겨울궁전에 두 번 들어간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항복 협상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으로 열다섯 살에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파리와 뉴욕 망명길에서 트로츠키를 따르다 1917년 5월 메즈라이온치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들어가 협상했으며(처음엔 팔친스키에게 체포됐다가 사관생도들의 요구로 풀려났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무사 통행을 보장한다는 약속으로 수비대가 잇달아 궁을 떠나게 했다.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독일 점령군·중앙라다와 싸우다 1917년 12월 라다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키예프에 들어온 소비에트군에 풀려났고,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된 끝에 숨졌는데, 전사했다는 기록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 1917.11–12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 중앙라다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 1918.01–04소련군에 구출; 키예프 민사위원;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되어 자살
관련 역사 사건
겨울궁전 협상과 방어선의 붕괴
1917년 10월 25일 인민위원으로서 그는 협상 대표로 겨울궁전에 들어갔다. 팔친스키의 기록에 따르면 오라니엔바움 사관학교 인원들이 그를 붙잡았으나, 같은 학교 사관생도들이 석방을 압박했고 그는 준위 다슈케비치와 따로 풀려났다. 그가 다시 들어오자 팔친스키는 「또다시 추드놉스키. 그를 체포」라고 적었다.
협상의 실질 효과는 방어선 자체에 나타났다. 팔친스키는 여러 부대가 하나둘 빠져나가고 무장해제가 저항 없이 진행되었다고 기록했으며, 궁전 함락은 「한쪽의 힘이 아니라 다른 쪽의 약함」의 결과라는 결론을 남겼다. 한편 그는 무기를 버린 이들을 보내주기로 한 합의를 「볼셰비키의 함정」이라고도 적었는데, 이 구절은 1933년 『붉은 기록』에 실릴 때 누락되었다.
추드놉스키 자신도 같은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1917년 11월 21일(구력 8일) 『프라우다』에 『항복 직전의 겨울궁전에서』를 실어 협상 과정을 자기 시점에서 서술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10월 25일의 정황이 일시의 돌격이 아니라 거듭된 최후통첩과 협상, 대표자들의 반복된 체포와 석방이 뒤섞인 긴 포위전이었다는 점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