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의 행정가이자 전시 외교의 실무자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3–1915뉴욕 빈곤개선협회 가족복지부 고용국 감독관
- 1915–1918뉴욕시 아동복지국 사무국장
- 1921–1923미국 적십자 남서부 지부 총괄 관리자
- 1933–1935연방긴급구호청장
- 1935–1938공공사업진흥청장
- 1938–1940미국 상무장관
- 1940–1945루스벨트 대통령 특별보좌관·전시 특사
- 1945트루먼 대통령 특사, 모스크바 회담 대표
- 1946뉴욕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대소 협상과 대소련 지원 논쟁
홉킨스는 전쟁기 소련 문제를 담당한 미국의 최고위 실무자였다. 그는 중간급 간부부터 스탈린까지 소련 관리들과 접촉했고, 무기대여 업무에서 소련 측 대응자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미코얀의 대응자였다. 그는 루스벨트의 구상을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에 설명해 미국의 목표에 대한 소련의 협조를 얻으려 했으나, 그 시도는 제한적인 성과에 그쳤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에는 무기대여 대상에 소련을 포함하도록 루스벨트에게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 7월 그는 스탈린과의 직접 접촉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미국 내에서는 소련 지원을 둘러싼 공화당의 반대가 거듭 제기되었지만, 홉킨스는 소련군이 전쟁의 무게를 지고 있는 만큼 지원이 전쟁 종결을 앞당긴다고 보아 대소련 공급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1943년 8월 10일 그는 소련의 결정적 역할을 두고 유럽에서 추축국을 패퇴시키려면 소련이 전쟁에 남아야 하며, 독일이 무너진 뒤에는 유럽에 소련의 군사력을 막을 세력이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소련 측의 협조가 늘 원활했던 것은 아니어서, 소련은 1945년 3월 28일 확보한 그디니아의 독일 실험용 잠수함 기지에 미국 해군 전문가들을 들여보내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무기대여 물자를 실어 나른 호송선단의 보호와 직결된 문제였다.
소련과의 밀착은 그 자신에 대한 정치 공세의 재료가 되었다. 1943년 중반에는 부인 루이즈가 영국 언론 재벌 비버브룩 경에게 거액의 에메랄드를 받았다는 의원의 주장이 제기되었고(루이즈는 부인했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의 기사를 두고 명예훼손 소송을 검토했다. 사후에도 조지 레이시 조던이 1949년 12월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서 홉킨스가 핵물질과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고 증언했다. 사학자 데이비드 롤은 조던의 주장을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반면, 숀 맥미킨은 2021년 저서에서 1970년대에 공개된 무기대여 관련 문서들이 불법 행위 주장을 제외한 조던의 주장 대부분을 뒷받침한다고 썼다. 에드워드 마크에 따르면 홉킨스는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반독일·친미적이었다는 평가가 있으며, 로버트 컨퀘스트는 그가 소련의 동기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