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어 「인터내셔널」 가사를 쓴 시인이자 치머발트에 간 네덜란드 좌파 사회주의자
네덜란드 시인이자 마르크스주의 저술가. 호르터의 권유로 『자본』을 읽고 1897년 사회민주노동자당에 들어가 당 지도부와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활동했다. 1911년 당을 떠나 1915년 혁명적 사회주의 연합을 세웠고 이듬해 사회민주당(SDP)에 합류했으며, 치머발트 회의에 참가했다. 공산당 안에서는 호르터·판네쿠크의 좌파에 섰다가 1927년 당과 결별했고, 만년에는 기독교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인터내셔널」의 네덜란드어 가사를 썼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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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52
독립 활동대표
문학·예술 -
1897–1911
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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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7
문학·예술
경력 연표
- 1896화가 리하르트 롤란트 홀스트와 결혼했다.
- 1900사회민주노동자당 대표로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갔다.
- 1915혁명적 사회주의 연합을 세우고 치머발트 회의에 참가했다.
- 1918.11.13베인코프와 함께 암스테르담 오라녜나사우 병영으로 가는 행진을 이끌었다.
- 1927공산당과 결별했다.
- 1952.11.21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
당을 떠난 정통파에서 공산주의 좌파로
롤란트 홀스트는 1890년 무렵 「80년대파」의 시인 알버르트 페르베이와 사귀며 시인의 길에 들어섰고, 1896년 화가 리하르트 롤란트 홀스트와 결혼한 뒤 헤르만 호르터의 권유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었다. 1897년 사회민주노동자당에 들어간 그는 밤마다 연기 자욱한 강당에서 노동자들에게 투쟁을 호소했고, 당 지도부에 들어가 1900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 대표가 되었다. 국제 대회에서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레프 트로츠키와 사귀었다. 『네덜란드의 자본과 노동』(1902), 1903년 철도 대파업을 다룬 글, 『총파업과 사회민주주의』(독일어판은 카우츠키가 서문) 같은 저술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자리 잡았다.
1909년 트리뷔너파가 쫓겨날 때 그는 당에 남았지만, 1911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을 떠났다. 다른 정통파와 달리 곧장 사회민주당(SDP)으로 가지 않고 룩셈부르크의 충고를 거슬러 몇 해 동안 당적 없이 지냈다. 1915년 사회민주노동자당과 사회민주당 당원 몇과 함께 혁명적 사회주의 연합을 세웠고, 같은 해 치머발트 회의에 네덜란드 대표로 참가했다. 이 연합은 이듬해 사회민주당에 합쳐졌고 그도 당원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뒤 공산주의자가 된 그는 1918년 11월 13일 다비트 베인코프와 함께 암스테르담의 오라녜나사우 병영으로 가는 행진을 이끌었으나, 진압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며 「일어나지 않은 혁명」으로 끝났다.
공산당 안에서 그는 호르터와 안톤 판네쿠크의 좌익 공산주의 분파 편에 섰다. 1921년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다녀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를 썼지만, 당 내부의 다툼에 지쳐 1927년 당과 결별했다. 그 뒤에도 반대파가 만든 공산주의 투쟁·선전 클럽 연맹에 참여했고, 모하맛 하타 같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내며 반제국주의 연맹 창립 대회에도 갔다. 만년의 시와 저술은 점점 종교적 색채를 띠었고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