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독일 1923–2023 ○ 자연사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칠레 쿠데타와 남미 대량탄압에 대한 정치적 책임

키신저는 살바도르 알렌데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전복 공작을 주도했다. 1970년 9월 선거 8일 뒤인 9월 12일, 그는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와 전화로 "우리는 칠레를 망하게 두지 않겠다"고 말했고, 사흘 뒤 닉슨은 CIA에 '경제를 비명 지르게 하라'고 명령하며 키신저를 공작의 감독자로 지명했다. 부관 비런 베이키는 쿠데타 기도가 '광범위한 폭력과 반란'을 낳을 것이며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원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무시됐다. 1970년 알렌데 취임을 막으려던 공작은 군 총사령관 르네 슈나이더 암살로 이어졌고 실패했다. 이후 키신저는 국무부의 공존 제안을 물리치고 닉슨에게 알렌데의 "교활한 모범 효과"를 경고하며 정권 교체를 설득했다.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직후 닉슨과의 통화에서 키신저는 미국이 쿠데타를 '도왔다'고 말하며 "가능한 한 최선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했다. 쿠데타 후 대규모 탄압을 두고 국무부 보좌관들이 우려를 제기했지만, 키신저는 대사에게 피노체트에게 "긴밀히 협력하고 우호적인 관계의 확고한 기반을 세우려는 우리의 강한 열망"을 전하라고 지시했으며, 미주 담당 차관보가 수백 명 사망 보고를 의회에 어떻게 알릴지 묻자 "행동이 불쾌하더라도 이 정부가 알렌데보다 우리에게 낫다"고 답했다. 미국은 경제·군사 원조와 외교적 지원, 그리고 칠레 비밀경찰 DINA 창설 지원으로 피노체트 체제 공고화를 도왔다. 1975년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키신저는 칠레 외무장관 파트리시오 카르바할 면담에서 인권 문제를 의제에 올린 자기 참모들을 조롱했고, 1976년 6월 피노체트에게는 "당신들은 알렌데를 전복시킴으로써 서구에 큰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이 국면은 데탕트·SALT·중국 개방과 같은 업적으로만 서술될 수 없는, 문서로 확인되는 정치적 책임의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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