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 최초의 총사령관, 제국군 대령에서 혁명의 군사 건설자로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 1891–1917차르 군대에서 복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장으로 종군하여 대령까지 진급
- 1917–18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2군 사령관,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장 역임
- 1918.07모스크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진압 지휘
- 1918.07–09동부전선 사령관
- 1918.09–1919.07RSFSR 전군 총사령관 — 붉은 군대 최초의 총사령관
- 1919–37적군 군사 아카데미에서 교편, 1927년 교수, 1935년 2등급 군사령관
- 1937/1957대숙청 속 체포·처형, 1957년 복권
관련 역사 사건
1919년 체포와 몰락: 총사령관의 위기
1919년 7월 8일, 소비에트 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이오아킴 바체티스는 자신의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혐의는 반혁명 백위대 조직 가담이었다. 체포 명령이 담긴 전보에는 레닌, 제르진스키, 크레스틴스키, 스클랸스키가 공동 서명했으며, 수신인은 군사해사인민위원 트로츠키였다. 전보에 따르면, 바체티스의 전속 장교였던 전직 대위 도모지로프가 음모에 관한 자백 진술을 했고, 바체티스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또 다른 전속 장교 이사예프가 그 음모에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실질적인 배경에는 동부전선 작전 방향을 둘러싼 바체티스와 후임 동부전선 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의 전략 논쟁이 있었다. 바체티스는 우랄에서 진격을 멈추고 주력을 남부의 데니킨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카메네프는 동부 공세를 지속하면서도 남부에 병력을 돌릴 수 있다고 맞섰다. 이 논쟁은 군사 문제를 넘어 당 지도부 내 권력 투쟁과 얽혀들어 갔다. 트로츠키가 바체티스를 지지한 반면, 스탈린은 카메네프 편에 섰다. 체카 특별부는 수사 결과 이 '백위대 조직'이 초기 단계에 불과하며 전선 작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바체티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레닌은 같은 날 바체티스의 총사령관 해임 결의안에 서명했다. 약 두 달간 수감된 바체티스는 감옥에서 자서전적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0월에 모든 혐의가 취소되었으나 총사령관직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역사가 니콜라이 체루셰프는 이 사건을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대립 과정에서 벌어진 배후 음모로 해석하며, 백위대 음모 자체의 실재성을 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