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습격을 이끌고 코스타리카 대사로 위장한 뒤 역사학자가 된 소련 비합법 요원
1952년 그리굴레비치는 코스타리카 대사 테오도로 카스트로로 로마에 있었다. 소련 공작 문건은 이 ‘대사’가 티토를 만나 폐페스트균을 뿌리는 안을 담고 있었다. 이듬해 스탈린이 죽자 계획은 취소되었다.
빌뉴스 일대의 카라임 집안에서 태어나 10대에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하다 폴란드에서 옥고를 치렀다. 코민테른 일로 아르헨티나에 갔고, 스페인 내전에서 NKVD 공작원이 되어 POUM 탄압에 가담했다. 1940년 5월 시케이로스와 함께 트로츠키 저택을 습격했으나 실패했고, 전쟁 중 아르헨티나에서 독일행 화물 방화 조직을 운영했다. 코스타리카인으로 위장해 1952~1953년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주재 대사를 지내며 티토 암살안의 실행자로 지목되었다. 1956년 해임된 뒤 라틴아메리카·바티칸 연구자가 되어 소련 과학아카데미 준회원에 올랐다.
다른 이름: 테오도로 카스트로 · 이오시프 라브레츠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6–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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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88
보안·정보·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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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88
학술·연구
경력 연표
- 1927파네베지스 김나지움에서 공산주의 활동으로 퇴학, 빌뉴스로 이주
- 1932.02.25–1933.05.17폴란드 비밀경찰에 체포, 재판 끝에 집행유예 2년
- 1934.08–1936코민테른 파견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
- 1936–1937스페인 내전: 마드리드 보안대, 카탈루냐에서 POUM 탄압
- 1937.10–1938말라홉카의 비합법 요원 과정 수료
- 1940.05.24멕시코에서 트로츠키 저택 습격
- 1941–1945아르헨티나 거점: 독일행 화물 방화 조직 운영
- 1949–1953.12테오도로 카스트로 명의로 로마에서 활동, 1952년부터 코스타리카 대사
- 1956고등당학교 졸업, 비합법 정보기관에서 해임
- 1958역사학 준박사 학위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민족학연구소 분과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준회원
관련 역사 사건
빌뉴스의 소년은 어떻게 코민테른 요원이 되었나?
그리굴레비치는 1913년 5월 5일 태어났다. 출생지는 흔히 빌뉴스로 적지만 그의 인사 기록에는 트라카이로 되어 있다. 부모는 소수 민족인 리투아니아 카라임에 속했다고 하는데, 역사가 보리스 볼로다르스키는 어머니가 러시아인이었다고 본다. 그 자신은 소련 여권의 민족란에 카라임이라고 적었다.
집안은 독립 리투아니아의 파네베지스에 살았고, 아버지는 1926년 일자리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13살의 아들은 공산주의 지하 조직에 들어가 전단을 뿌렸고, 1927년 경찰의 요구로 퇴학당했다.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당시 폴란드 땅이던 빌뉴스로 옮겼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활동을 이어 가다 1932년 2월 25일 폴란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던 1933년 4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5월 17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폴란드를 떠난 그는 파리로 가서 소르본에서 공부하며 코민테른과 이어졌다. 1934년 8월 코민테른 대표는 국제적색구원회 일로 그를 아르헨티나에 보내자고 제안했고, 그는 위임장을 재킷 안감에 꿰매 넣고 떠났다. 볼로다르스키는 그가 이미 파리에서 OGPU에 포섭되었다고 본다.
스페인 내전에서 그는 무슨 일을 했나?
1936년 스페인으로 간 그는 국제여단을 거쳐 11월 말 마드리드 방위평의회의 보안대로 옮겼다. 12월 그의 부대는 프랑코 지지자들이 숨어 있던 핀란드·칠레·페루 대사관 건물을 잇달아 급습해 수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소련 쪽 문서에 따르면 그는 알렉산드르 오를로프와 나움 에이팅곤 아래서 일하며 ‘막스’라는 암호명을 썼다. 1937년 5월 3일 10명 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카탈루냐로 파견되어 POUM과 아나키스트 탄압에 가담했고, 미트로힌 문서는 그가 트로츠키파 제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는다. 영어권 연구는 그가 POUM 지도자 안드레우 닌 살해와, 이들을 프랑코의 첩자로 몰아간 조작 문건 작성에도 관여했다고 본다. 반세기 뒤 그 자신은 이 작전을 거의 소극처럼 회고했는데, 이 회고는 문서가 보여 주는 내용과 맞지 않는다.
오를로프의 『스탈린 범죄의 비밀 역사』는 스페인 공작을 거의 다루지 않으며 그의 이름도 적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를로프의 망명은 그에게 위협이었다. 오를로프는 그의 얼굴과 공작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 저택 습격은 어떻게 실패했나?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는 1937년 10월 말라홉카에서 비합법 요원 훈련을 받았고, 시피겔글라스의 지도 아래 멕시코를 맡았다. 트로츠키가 그곳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 5월 24일 새벽 4시쯤, 경찰과 군 제복을 입은 스페인 내전 참전자 약 20명이 코요아칸의 트로츠키 저택에 들이닥쳤다. 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이 무리를 이끌었고 그리굴레비치도 함께였다. 그들은 침실에 10~15분 동안 총을 퍼부었지만, 트로츠키와 나탈리야 세도바는 바닥에 엎드려 살아남았다. 손자가 발을 다쳤을 뿐이다. 문을 열어 준 경비원 로버트 셸던 하트는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갔고, 1941년 6월 비밀 포고로 붉은별 훈장을 받았다. 석 달 뒤 트로츠키를 죽인 것은 다른 경로로 침투한 라몬 메르카데르였다.
전쟁 중 아르헨티나에서는 무엇을 했나?
1940년 그는 ‘아르투르’라는 암호명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비합법 거점을 세우러 갔다. 나중에 멕시코 출신 아내 라우라 아라우호도 위조 여권으로 합류했다.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자 그의 ‘D 그룹’은 독일로 가는 남미산 전략 물자를 노렸다.
1941년 12월 폴란드인 대원이 항구 근처에 작업장을 차려 시한 소이탄을 만들었고, 대원들은 이를 마테차 꾸러미로 위장해 부두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가 모스크바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초석 1만 톤씩을 실은 대서양 화물선 두 척이 가라앉았고, 방화는 약 150건에 이르렀다. 다만 이 수치는 그의 보고에서 나온 것이다.
어떻게 소련 요원이 코스타리카 대사가 되었나?
1949년 그는 코스타리카의 작고한 커피 재배업자의 사생아 테오도로 카스트로 행세를 하며 로마에 정착해 무역 사업을 벌였다. 사업과 사교로 쌓은 인맥에 코스타리카 전 대통령 호세 피게레스의 후원이 더해져, 1951년 코스타리카 대사관 대리대사가 되었고 유엔 총회 대표단에도 참여했다. 1952년에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겸임하는 대사가 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를 15차례 알현했고 몰타 기사단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갈라선 뒤 스탈린은 티토 제거 공작을 승인했다. 1952년 가을 국가보안상 이그나티예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친필 문건은 ‘막스’, 곧 그리굴레비치를 최적의 실행자로 꼽았다.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문건의 안은 그가 티토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폐페스트균을 뿌리는 것으로, 그는 미리 혈청을 맞게 되어 있었다. 수도플라토프는 이 방안을 그리굴레비치 자신이 냈다고 쓰지만, 유리 파포로프가 전한 본인의 말은 다르다. 임무가 자살이나 다름없어 시간을 벌려고 다른 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죽자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가족과 함께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빠져나갔다. 로마에서는 코스타리카 대사 일가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두고 온갖 소문이 돌았다.
요원은 어떻게 역사학자가 되었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새 지도부의 불신을 받았다. 1956년 고등당학교를 마치고 19년 7개월 만에 비합법 정보기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바티칸과 라틴아메리카 연구로 돌아서, 1957년 책 『바티칸: 종교, 재정, 정치』로 이듬해 준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민족학연구소에서 일했고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창설에도 참여했다. 『쿠바의 문화 혁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네 번째 도전 끝에 1979년 과학아카데미 준회원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을 딴 이오시프 라브레츠키라는 필명으로 체 게바라, 시몬 볼리바르, 판초 비야, 살바도르 아옌데, 시케이로스의 전기를 써서 널리 읽혔다. 동료들은 40대 이전의 경력이 없고 사진 찍기를 꺼리는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의 첩보 경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소련 붕괴 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