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도리오

Jacques Doriot
파시스트·나치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8–1945 ✕ 기총소사로 사망

인민전선을 가장 먼저 요구하고 파시스트로 끝난 생드니의 공산주의자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프랑스공산당 기구의 청년 지도자 시절, 1920~1932

도리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케미데담 전투에서 부대가 괴멸당했고, 부상한 전우를 적진에서 끌어낸 공로로 크루아 드 게르를 받았지만 규율 위반으로 한 달 금고형도 받았다. 1920년 생드니로 돌아온 그는 사회당 안에서 제3인터내셔널 지지파에 합류했고, 그해 가을 청년조직이 청년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가맹하면서 전국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전쟁으로 각인되고 가족 부양 부담이 없던 그는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1921~1922년 그는 프랑스 청년공산주의자를 대표해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선전과 선동을 익혔고 레닌을 만나 깊이 존경했다. 귀국 후 1923년 청년공산주의자 조직의 수장이 되어 조직을 볼셰비키화 도구로 개조했으며, 노동체육연맹 침투를 주도해 1930~1934년 적색체육인터내셔널 의장을 지냈다. 1923년 1월 루르 점령 반대 운동에서 그는 군인 불복종 선동죄로 금고형을 받았는데, 점령 전날 루르에 프랑스 병사와 독일 민중의 형제애를 호소하는 벽보를 붙인 것이 이유였다. 1924년 5월 11일 센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저녁에야 풀려났고, 그해 여름 병사들에게 적과의 형제애를 호소하는 팸플릿을 냈다.

1922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 위원, 1924년 프랑스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국제 문제에 가장 정통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베르사유 조약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민족자결권을 주장했다. 1927년 2월에는 코민테른이 소련과 장제스 정부의 협정을 감독하려 보낸 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갔으나, 그해 4월 장제스가 소련과 결별하고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를 학살했고, 5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는 스탈린을 보호하려 중국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 1929년 3월 31일 시작된 프랑스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그는 '계급 대 계급' 노선에 미온적이라는 공격을 받고 굴욕적인 자기비판을 했다. 1931년에는 위법한 시정 운영으로 해임된 생드니 시장직을 이어받아 도시를 개인적 기반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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