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프랑스 혁명의 신고전주의 화가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 장폴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1780년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자코뱅 클럽 성원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다.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공포정치에 관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1794~1795년 두 차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04년 제정 선포 후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지로데·제라르·그로·앵그르 등을 길러냈다.

다른 이름: 자크-루이 다비드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브뤼셀 망명: 유배자의 작업장과 시역자 공동체

워털루 이후 다비드는 혁명 전력과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 때문에 보복을 예상하고 《사비니 여인들》과 《대관식》, 《독수리 분배》, 《레오니다스》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가 1815년 8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16년 1월 12일 법률은 추가 의정서에 서명한 시역자들을 사면에서 제외하고 왕국에서 추방했는데, 경찰대신 엘리 데카즈가 그를 이 법의 적용에서 빼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다비드는 스스로 이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작업실 운영을 앙투안장 그로에게 맡기고 프랑스를 떠났고, 두 달 뒤 아카데미 데 보자르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망명의 원인을 두고는 서술이 갈린다. 영어판은 루이 18세가 사면과 궁정 화가 자리를 제안했으나 그가 이를 거절하고 브뤼셀에서의 자발적 망명을 택했다고 본다. 프랑스어판은 왕정복고 아래에서 그의 시역자·제정 예술가 전력이 그에게 망명을 안겼다고 본다. 두 서술은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그는 추방 대상이었고, 동시에 유예 제안을 거절한 선택도 했다.

로마는 처음 청한 망명을 거절했고 벨기에가 그를 받아들여 1816년 1월 27일 브뤼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옛 동료 시역자 의원들인 바레르와 알키에, 시에예스를 다시 만났으며 시에예스의 초상은 그가 직접 그렸다. 벨기에 제자들의 도움도 받아 여러 작품을 완성했다. 앙투안장 그로와 제자들이 귀국을 청원했고 루이 18세가 사면을 제안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를 예술장관으로 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벨기에에 남기로 했다.

브뤼셀에서 그는 라 모네 극장의 단골 관객이 되었고 그곳에서 본 네덜란드·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에 열광하며 팔레트를 되살렸다. 망명자와 벨기에 유지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고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딸들을 그려 주었으며 그중 샤를로트 보나파르트에게는 소묘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아킬레우스의 분노》(1819)와 《텔레마코스와 에우카리스의 이별》(1822), 《큐피드와 프시케》(1817) 같은 신화 주제 작품을 그렸다. 1824년에는 75세의 나이로 마지막 대작 역사화 《비너스에게 무장해제된 마르스》를 완성했고, 파리에서 연 전시에는 9,500명이 관람했다.

1820년부터 건강이 나빠졌고 1824년에는 라 모네에서 돌아오다 마차에 치여 부종이 생겼으며, 1825년 11월 뇌출혈로 두 손이 마비되어 더는 붓을 들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825년 12월 29일 레오폴드가 자택 침대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정부가 유해의 귀환을 거부하자 1826년 10월 11일 생조스텐노드의 레오폴드 지구 묘지에 처음 묻혔고, 심장만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있던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1882년 유해는 에베르의 브뤼셀 묘지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