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최르기벨

Karl Friedrich Zörgiebel

1929년 「피의 5월」 진압을 지휘한 사회민주당 출신 베를린 경찰청장

마인츠의 통 제조공 출신으로 1901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노조와 당 지구 서기로 일했다. 11월 혁명 때 쾰른 노동자·병사 평의회에 참여했고 1920~1924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2년 쾰른, 1926년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었다. 1929년 5월 1일 집회 금지를 어긴 공산당 메이데이 시위를 강경 진압해 30명 넘게 죽게 한 「피의 5월」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으로 공격하는 상징이 되었다. 나치 집권 뒤 해임·투옥되었고, 전후 라인란트팔츠 경찰청장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1929년 「피의 5월」

최르기벨은 1929년 3월 21일 프로이센 전역에 내려진 옥외 집회 금지를 근거로 베를린의 전통적인 메이데이 집회를 금지했다. 그는 나치와 공산당의 충돌을 우려한다고 내세웠다. 그런데도 5월 1일 독일 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수천 명이 거리에 나오자, 최르기벨과 프로이센 내무장관 알베르트 그르제신스키의 명령으로 경찰은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충돌과 파업은 5월 2~3일까지 이어졌고, 경찰은 시위대뿐 아니라 베딩과 노이쾰른의 무고한 주민까지 죽였다. 5월 3일 공산당의 무장 조직 적색전선투사동맹이 금지되었고 이 금지는 5월 14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최르기벨은 5월 3~6일 두 구역에 통행·소등 금지령까지 내렸다.

최르기벨은 처음에 23명의 죽음만 인정했고,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르베르츠』는 이들을 「공산주의 선동의 희생자」라고 불렀다. 사망자 수는 나중에 33명으로 고쳐졌다. 자유주의 신문들까지 경찰의 무고한 행인 폭행을 규탄했고, 공산당 의원 파울 프뢸리히와 빌헬름 피크는 그를 「노동자 살해자」로 불렀다. 같은 해 7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10차 총회 테제는 사회민주주의를 고발하며 「사회민주주의는 메이데이 시위를 금지한다. 그것은 메이데이 시위에서 비무장 노동자들을 쏘아 죽인다」라고 썼다. 『로테 파네』의 베르너 히르슈는 그를 「사회민주당의 노동자 도살자」라고 불렀다가 1930년 벌금형을 받았다. 역사가들은 「피의 5월」을 나치에 맞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협력 가능성을 막은 사건 가운데 하나로 본다.

1930년 11월 임시 퇴직한 최르기벨은 1931년 12월 도르트문트 경찰청장으로 복귀했고, 1932년 프로이센 쿠데타 뒤에도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사회민주당원이었다.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해임되었고 9월 체포되어 넉 달 동안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