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 파네』 편집장이자 텔만의 비서, 나치 수용소와 소련 감옥을 모두 겪은 공산주의 언론인
베를린의 유대계 판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과 스파르타쿠스단에 들어갔고, 킬 수병 봉기와 독일 공산당 창당 대회에 참여했다. 1921년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났다가 1924년 복귀해 1928년 하인츠 노이만과 함께 『로테 파네』 편집장이 되었다. 1932년 텔만의 비서가 되었고 1933년 3월 텔만과 함께 체포되어 나치 수용소를 전전했다. 풀려난 뒤 망명했으나 1936년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고, 1941년 부티르카 감옥에서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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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8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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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1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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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6
독일 공산당대표
이념·선전
경력 연표
- 1917독립사회민주당과 스파르타쿠스단에 가입했다.
- 1918.11킬 수병 봉기에 참여하고 인민해병사단을 함께 세웠다.
- 1918.12독일 공산당 창당 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석했다.
- 1921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났다.
- 1924.09–1925.06빈에서 오스트리아 『로테 파네』 편집을 이끌었다.
- 1928노이만과 함께 베를린 『로테 파네』 편집장이 되었다.
- 1929『베를린의 피의 5월』을 펴냈다.
- 1932텔만의 비서가 되었다.
- 1933.03.03텔만과 함께 체포되었다.
- 1936.11.04모스크바 호텔 룩스에서 체포되었다.
- 1937.11.1010년 수용소형을 받고 솔로베츠키로 보내졌다.
- 1941.06.10부티르카 감옥에서 죽었다.
『로테 파네』에서 두 체제의 감옥으로 (1928~1941)
1928년 히르슈는 하인츠 노이만과 함께 베를린 『로테 파네』 편집장이 되어 사회파시즘 노선의 대변자가 되었다. 1929년 「피의 5월」 뒤 그는 베를린 경찰청장 카를 최르기벨을 「대량 살인자」, 「냉철하게 계산하는 사회민주당의 노동자 도살자」라고 불렀다가 1930년 4월 1000마르크 벌금형을 받았고, 같은 해 『베를린의 피의 5월』을 펴냈다. 트로츠키는 『다음은 무엇인가?』에서 히르슈가 1932년 1월 『디 인터나치오날레』에 스탈린을 따라 파시즘과 의회 민주주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가르쳤다며, 그런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항복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했다.
1932년 텔만의 비서가 된 그는 1933년 3월 3일 텔만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보호 구금」 상태로 고문을 받으며 경찰 감옥, 게슈타포 본부, 브란덴부르크·리히텐부르크·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를 전전했고, 제국의회 방화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다. 어머니가 에미 괴링을 통해 헤르만 괴링에게 청원해 풀려난 뒤 프라하로 망명해 수용소 체험을 고발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나치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을 샀다. 한스 키펜베르거 등은 그를 「트로츠키주의자 게슈타포 첩자」로 몰았고, 당은 그에게 모스크바에 가서 해명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936년 11월 4일 호텔 룩스에서 체포되었고, 고문에도 자백을 거부했지만 1937년 11월 텔만을 경찰에 넘겼다는 등의 혐의로 10년 수용소형을 받았다. 솔로베츠키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며 독방 처벌을 거듭 받은 그는 크게 쇠약해진 채 부티르카 감옥으로 옮겨져 1941년 6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