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김일성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2–1994 ○ 병사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7년 6월 4일, 보천보의 밤

1937년 6월 4일 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사장 김일성)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 량강도 보천군)를 습격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기관이 불탔다. 군사적으로는 소규모 작전이었으나 정치적 반향은 컸다. 「동아일보」가 이튿날 두 차례의 호외로 이 소식을 전하면서, 국내 민중은 국경 너머에서 일제와 싸우는 조선인 유격대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근교 만경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30년대 초부터 중국공산당 계열의 항일 유격대에서 싸웠고,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일제의 토벌이 극심해진 1940년 소련 연해주로 이동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방의 날을 준비했다.

보천보 전투는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이 만주 유격대의 경험이 해방 후 북한 국가의 성격 자체를 규정했다고 분석한다.

1948년 9월 9일, 공화국 창건에서 주체까지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946년 3월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주요 산업 국유화와 남녀평등권 법령이 뒤따랐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고 그는 초대 내각 수상이 되었다.

1950–1953년의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은 북부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전후 복구는 소련과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의 원조 속에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고, 1950년대 후반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적 증산 운동으로 중공업의 기반을 세웠다. 1960년대 북한의 공업화 수준은 당시의 남한을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5년 12월 28일의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할 데 대하여」에서 김일성은 「주체」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 사이에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를 내세운 이 노선은 이후 주체사상으로 체계화되어 공화국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그는 1994년 7월 8일 사망할 때까지 반세기 가까이 국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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