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9– 사회운동·조직
경력 연표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관련 역사 사건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분화
김원봉은 1938년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을 맡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해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좌파 단체들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직한 군사부대였으며, 초기 대원은 약 200명이었다. 부대는 전투뿐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의 정보 수집과 포로 취조, 일본군 및 중국군·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전, 적 문서 번역을 수행했다. 1940년 2월 병력은 314명으로 늘었고, 부대는 후난·장시 및 안후이·뤄양 일대에서 활동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뒤 일부 대원이 그쪽으로 옮겨가고 이탈자가 생기면서 1941년 5월에는 81명으로 줄었다.
이와 별도로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화북으로 이동했다. 김원봉이 이끄는 본부는 충칭에 남았고, 1940년 11월 결정에 따라 대원들은 1941년 3월 뤄양에서 황허를 건너 화북으로 갔다. 그해 7월 린현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어 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했고, 5월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화북지대는 이 편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주력은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과 광복군 편입은 하나의 통합 과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대들의 경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