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크사베리예비치(출생) / 콘스탄티노비치(개명)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6–1968 ○ 전립선암

소련과 폴란드의 두 원수, 1945년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하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바그라티온과 '두 방향 타격' 논쟁

1944년 5월, 최고사령부에서 벌어진 바그라티온 작전 계획 토의는 로코솝스키의 군사적 통찰력과 강직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순간이었다. 스탈린과 주코프는 벨로루시 해방을 위해 1벨로루시 전선군이 단일 주공(主攻) 방향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코솝스키는 반대했다. 그는 보브루이스크 방향으로의 단일 공격은 독일군이 예비대를 집중시킬 시간을 준다며, 두 방향에서 동시에 주타격을 가해야 적의 측면을 포위하고 기동력을 봉쇄할 수 있다고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그를 회의장 밖으로 내보내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로코솝스키는 옆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가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두 방향 타격이 옳습니다, 스탈린 동지." 스탈린이 다시 "생각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묻자, 로코솝스키는 "더욱 확신합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스탈린은 이를 수용했고, 이 '전략적 묘수'는 작전의 성공을 결정지었다.

1944년 6월 23일 개시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로코솝스키의 두 방향 돌파는 독일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두 달 만에 벨로루시 전역이 해방되었고, 독일군 17개 사단이 완전 소멸되었으며 50개 사단이 전력의 절반을 상실했다. 이 승리 직후 스탈린은 그를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호칭은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 외에는 없던 예우였다. 같은 해 6월 29일 로코솝스키는 소비에트연방원수로 진급했고, 이후 바그라티온은 소련 작전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폴란드 원수: 국방장관과 1956년 폴란드 10월

1945년 5월 29일, 로코솝스키는 레그니차에 둔 북부군집단 사령관이 되었다. 1949년 11월 6일에는 폴란드 국방장관에 임명되고 폴란드 원수 계급을 받았다. 이 임명은 당시 시행 중이던 폴란드 법을 어긴 것이었는데, 1948년 4월 3일 법령은 폴란드 장교 계급을 먼저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관으로서 그는 폴란드 군대의 소련화를 밀어붙였다. 이념 교육 시간이 늘었고, 부대 편제와 제복은 붉은 군대를 그대로 본떴으며, 군 선서에는 '소련과의 동맹'이 들어갔고, 장교 충원과 진급의 결정적 기준은 정치적 충성도가 되었다.

1950년 5월 1일 로코솝스키는 26호 명령을 내려 폴란드 군대 안의 숙청을 승인했다. 전쟁 전 폴란드 장교들과 귀국한 폴란드 군 장병들이 축출되었고, 폴란드 장교 8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그중 40명이 사형되었으며 여기에는 1939년 헬 방어로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 3명도 있었다. 지상군에서는 숙청이 1949년 1월에 시작되어 18개월 동안 장교 1,200명을 제거했고, 1954년까지 약 9,000명의 장교가 군에서 쫓겨났다.

그는 1949~1956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당원이었고 1950년부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52년부터 부총리였다. 1955년 1월 그는 공안부장 스타니스와프 라트키에비치를 해임하는 표결에서 찬성한 정치국 위원 두 명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폴란드 군 전통의 일부도 지켰는데, 두 손가락 경례, 독수리 모표, 십자형 훈장, 전쟁 전 정복 제복 같은 것이었고, 서방에서 돌아온 장교 일부의 복귀도 지지했다.

1956년 6월 포즈난 사건에 대한 그의 책임을 두고 역사가들의 평가는 갈린다. 그가 당 정치국에 군대 투입을 제의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무력 사용에 반대했다는 견해도 있다. 사료는 두 입장을 모두 전하며 어느 쪽으로도 단정하지 않는다.

폴란드 10월 동안 그는 1956년 10월 20일 새 정치국에서 제외되었다. 11월 10일에는 국방장관과 부총리 직에서 해임되고 종신 연금을 받았으며, 이 결정들은 1956년 11월 13일 세임에서 확인되었다. 그는 폴란드 영구 거주 제안을 거절하고 폴란드 군에 있던 소련 고문 약 500명과 함께 소련으로 떠나 소련군 직위를 맡았다. 떠날 때 프란치셰크 침바레비치 장군에게 남긴 말은 이러했다. '러시아에서는 나는 폴란드인이었고,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인이었다.'

1956년 이후 소련에서 그는 국방부 부장관(1958~1962)을 지내고 트빌리시에서 자카프카스 군관구를 지휘했다. 1962년 조직·행정 직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1968년 죽을 때까지 소련군 검열관단의 일원으로 남아 후년을 군사 이론 저술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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