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숙청 집행자로, '붉은 군대의 인퀴지토르'라 불린 인물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1920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겸 국가편성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루마니아 전선의 차르 포병대 하사관1911~1917년 차르 포병대에서 복무하며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으로 있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정치위원
- 1937–1938대숙청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 군 숙청 주도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하산 호 파견 대표프리놉스키와 함께 극동으로 파견되어 블류헤르를 감시했다. 8월 3일 모스크바에 블류헤르가 지휘 능력이 없다고 보고하여 블류헤르의 해임을 촉발시켰다.
- 1939.11–1940.03겨울전쟁군 정치총국장 · 전선의 책임 추궁정치총국장으로 전선에 나가 패배의 책임을 추궁했다. 포위 궤멸된 제44사단의 지휘부 처형이 그 방식을 보여 준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군 정치총국장붉은 군대의 정치총국을 이끈 스탈린의 대리인이었다.
붉은 군대 숙청과 정치통제 (1930~1941)
1930년부터 1937년 11월까지 메흘리스는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이었다. 이 시기 《프라우다》에는 매일같이 '인민의 적'과의 투쟁을 강화하라는 자료가 실렸고,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음모를 폭로하는 기사와 간첩 공포를 부추기는 선전이 이어졌다. 1935~1936년에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선전 보도를 맡았으며, 피고 전원의 처형을 거듭 주장했다.
1937년 12월 30일부터 1940년 9월 6일까지 그는 국방부인민위원 겸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이었다. 그는 붉은 군대 내 대량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군에 배속된 정치위원 3만 명 가운데 최소 2만 명에 대한 숙청을 감독했다고 서술하며, 야드 바솀도 같은 수치를 제시한다.
1938년 5월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부수장 미하일 프리놉스키와 함께 하바롭스크로 가서 극동군 숙청을 감독했다.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는 체포되어 구타 끝에 죽었다. 메흘리스는 정치 요원 215명 전원을 해임했고 그 대부분이 체포되었다고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자랑했다.
1939~1940년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그는 붉은 군대가 왜 밀리는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도록 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패배의 원인을 배신으로 돌렸고, 사령관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와 그의 참모장, 정치부장을 군인들 앞에서 재판에 넘겨 총살했다. 1941년 9월에는 그의 명령으로 제34군 포병 사령관 바실리 곤차로프가 군단 사령부 앞에서 총살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곤차로프는 2002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야드 바솀은 메흘리스가 파견된 각 전선에서 지역 지휘관들에 대한 혐의를 날조했다고 서술하며, 그의 발의로 드. 파블로프, 브. 클리몹스키흐, 아. 그리고리예프, 아. 코로프코프, 엔. 클리치, 케이. 카차노프 등 장군들이 고문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은폐 없이 보존해야 할 탄압의 기록이다.
동시대인들의 평가는 서로 갈린다. 흐루쇼프는 그를 '정직하지만 다소 미친 사람'으로 기억하며 어디서나 적과 파괴자를 보았다고 했고, 제독 이사코프는 용감하기보다는 신경질적이고 흥분하며 광신적이었다고 평했다. 메레츠코프는 정직하고 용감하지만 의심이 많고 매우 무례했다고 썼다. 케르치를 목격한 시모노프는 그가 케르치 참사의 주요 책임이 있으며 '군사적으로 무식'하지만 개인적 용기는 흠잡을 데 없었고 개인적 명예를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니라고 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이후 경력과 전후 국가통제장관 재임은 생애 서술에서 다룬다.
케르치 참사 (1942)
1942년 1월 20일, 메흘리스는 스타프카(최고사령부) 대표로 케르치에 도착했다. 도착 이틀 만에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는 크림 전선 사령관 코즐로프 장군을 "당황하고 자신감 없는 지휘관"이라 맹비난했고, 이후로도 거의 모든 고위 장교에 대해 적대적인 보고서를 쏟아냈다. 참모장 톨부힌(훗날 원수)을 측근인 베치니 소장으로 교체하는 등 지휘부 인사를 마음대로 뒤흔들었다.
그러나 메흘리스 자신은 전선 재편성에 실질적 기여를 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공세 준비에만 매달린 채 방어태세 전환을 거부했고, 항공력을 적 전차와 병력 차단이 아닌 부차적 임무에 낭비했다. 스탈린은 5월 9일 전문에서 "당신은 크림 전선의 책임 있는 스타프카 대표이지 방관자가 아니다. 만약 '모든 정황이 아침에 적이 공격할 것임을 보여줬다'면, 왜 수동적 비판에 그치고 조직적 저항을 준비하지 않았는가?"라고 질책했다.
5월 8일, 만슈타인의 독일 제11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크림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소련군은 약 17만 명의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을 상실했고, 케르치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942년 6월 4일 스탈린은 메흘리스를 군단정치위원으로 두 계급 강등하고 국방부인민위원·정치총국장직에서 해임했다. 메흘리스가 직접 작성한 암호전문들에는 한결같이 타인의 과실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 자신의 책임은 단 한 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