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광신적 숙청자로, 파괴만 할 줄 알았던 '끔찍한 사내'
스탈린이 보건장관 스미르노프의 제안에 답하여: '메흘리스에게 창조적인 일을 맡기라고? 무언가를 부수고, 분쇄하고, 파괴하는 일 — 그런 데나 어울리는 사람이지.'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오데사 출신 유대인 볼셰비키로,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출발해 그의 가장 광적인 집행자가 되었다. 프라우다 편집장(1930–1937)으로 대숙청의 선전전을 지휘했고,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장교단에 대한 대량 숙청의 주요 조직자였다. 1942년 케르치 전선에서 스타프카 대표로서 지휘부에 파국적으로 간섭해 크림 전선 붕괴를 초래,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종전까지 복권되어 국가통제장관을 지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창조가 아닌 파괴에만 맞는 사람'이라 평했다.
경력 연표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 종전 시점까지 복권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정치위원
- 1937–1938대숙청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 군 숙청 주도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하산 호 파견 대표프리놉스키와 함께 극동으로 파견되어 블류헤르를 감시했다. 8월 3일 모스크바에 블류헤르가 지휘 능력이 없다고 보고하여 블류헤르의 해임을 촉발시켰다.
- 1939.11–1940.03겨울전쟁군 정치총국장 · 전선의 책임 추궁정치총국장으로 전선에 나가 패배의 책임을 추궁했다. 포위 궤멸된 제44사단의 지휘부 처형이 그 방식을 보여 준다.
- 1941–1945대조국전쟁군 정치총국장붉은 군대의 정치총국을 이끈 스탈린의 대리인이었다.
케르치 참사 (1942)
1942년 1월 20일, 메흘리스는 스타프카(최고사령부) 대표로 케르치에 도착했다. 도착 이틀 만에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는 크림 전선 사령관 코즐로프 장군을 "당황하고 자신감 없는 지휘관"이라 맹비난했고, 이후로도 거의 모든 고위 장교에 대해 적대적인 보고서를 쏟아냈다. 참모장 톨부힌(훗날 원수)을 측근인 베치니 소장으로 교체하는 등 지휘부 인사를 마음대로 뒤흔들었다.
그러나 메흘리스 자신은 전선 재편성에 실질적 기여를 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공세 준비에만 매달린 채 방어태세 전환을 거부했고, 항공력을 적 전차와 병력 차단이 아닌 부차적 임무에 낭비했다. 스탈린은 5월 9일 전문에서 "당신은 크림 전선의 책임 있는 스타프카 대표이지 방관자가 아니다. 만약 '모든 정황이 아침에 적이 공격할 것임을 보여줬다'면, 왜 수동적 비판에 그치고 조직적 저항을 준비하지 않았는가?"라고 질책했다.
5월 8일, 만슈타인의 독일 제11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크림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소련군은 약 17만 명의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을 상실했고, 케르치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942년 6월 4일 스탈린은 메흘리스를 군단정치위원으로 두 계급 강등하고 국방부인민위원·정치총국장직에서 해임했다. 메흘리스가 직접 작성한 암호전문들에는 한결같이 타인의 과실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 자신의 책임은 단 한 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