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여름 서유럽의 이른바 경제 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의 투자·생산 붐이 초래한 외환 부족이었을 뿐이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앨런 밀워드는 전후 서유럽 경제 재건과 통합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정주의 학자였다. 1984년 저서 『서유럽의 재건, 1945-1951』에서 마셜 플랜이 유럽 회복에 필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1947년의 '위기'는 경제 붕괴가 아니라 투자·생산 붐이 초래한 달러 부족이었고 소비를 1947년 수준으로 동결한다는 반사실적 가정 아래 대부분의 수혜국은 원조 없이도 수입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논증했다. 이후 『국민국가의 유럽적 구출』(1992)에서는 유럽 통합이 초국가적 이상이 아니라 파시즘 도전 이후 개별 국민국가를 구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부하린 전기로 '잃어버린 대안'을 제기하고 소련 개혁 가능성을 끝까지 주장한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스탈린의 등장과 흐루쇼프의 몰락과 소련의 종말, 각각에 대안이 존재했다."
스티븐 코언은 소비에트학계에서 소련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는 통념에 가장 체계적으로 반박한 학자였다. 1973년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정치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하며, 소련사가 단선적 필연이 아니라 분기점들의 연쇄였음을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고 부하린의 사후 복권에 기여했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의 대러 정책을 '실패한 십자군'으로 비판하면서 냉전 이후에도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워싱턴의 합의에 맞섰다.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게이트를 둘러싸고 친푸틴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미국 언론의 러시아 보도가 냉전기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하며 고립을 무릅쓰고 소신을 지켰다.
유리 주코프는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가로, 러시아 역사연구소에서 스탈린 시대와 소비에트 정치사를 연구했다. 그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를 대숙청의 집행자이자 책임 있는 정치가로 재평가하는 논의를 제기했다. 동시에 스탈린의 대중 탄압 책임을 축소하는 ‘다른 스탈린’ 해석으로 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탈스탈린화 이후의 역사 기억이 지닌 정치성을 드러냈다.
그는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에서 소련군의 전투와 철군을 내부 자료와 참가자 증언으로 다시 묶었다.
알렉산드르 랴홉스키는 소련군 장교이자 군사 저술가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작전과 정책 결정을 내부 경험과 문서 자료로 기록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에서 복무하며 발렌틴 바렌니코프의 보좌관으로 철군 국면을 지켜보았다. 1995년 출간한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은 개입 결정의 오류와 전쟁의 복합적 결과를 분석해, 소련의 패배 여부를 둘러싼 수정주의적 논쟁의 핵심 러시아어 자료가 되었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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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 이후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J. 아치 게티는 소련 정치사와 스탈린 시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로, UCLA에서 러시아·소련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1985년 저서 『대숙청의 기원』에서 스탈린 체제를 단일한 중앙 통제의 산물로 보지 않고, 취약한 당 조직과 지역의 자율성, 지도부 내부의 갈등이 정책 형성에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 접근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서방 수정주의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지만, 테러에 대한 스탈린과 당 지도부의 책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 기록보관소 개방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억압의 규모와 국가 폭력을 새 자료로 재검토했다.
야로프의 연구는 봉쇄를 견딘 사람들을 영웅과 가해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선택과 생존의 기록으로 읽게 했다.
세르게이 야로프는 러시아 20세기 사회사와 노동자 정치의식을 연구한 역사가로,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과 도덕적 선택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는 영웅적 저항이나 행정적 동원만으로 봉쇄사회를 설명하지 않고, 굶주림 속 연대와 순응, 생존 전략이 얽힌 경험을 사료로 복원했다. 『봉쇄 윤리』와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생활』은 재난 속 인간 행위의 모순을 공적 기억의 중심으로 끌어냈다.
피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에서 반당 그룹에 대한 언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거의 네 배 많았다고 지적했다.
알렉산드르 피지코프는 1950~1960년대 소련의 정치 변동을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국가 관료였다. 그는 스탈린 격하와 흐루쇼프 시기의 권력투쟁을 다룬 연구로, 1957년 반당 그룹의 패배가 당 정치의 언어와 경계를 어떻게 재편했는지 추적했다. 그의 분석은 제22차 당대회 결의가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반당 그룹 공격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을 짚어, 탈스탈린화가 단순한 과거 청산이 아니라 현재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학술 활동과 함께 교육부 차관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러시아 역사에 관한 논쟁적인 문명론적 주장을 내놓았다.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은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은 것이 되었다: 많은 이가 봤다고 하나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도 제시된 적 없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탈린 시대 연구자로, 소련 국가 반유대주의의 기록을 발굴해 학계의 표준을 세웠다. 그의 저서 『붉은 파라오의 포로』(1994)와 『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2001)는 의사들의 음모와 반세계주의 캠페인을 포함한 스탈린 말기 유대인 탄압의 전모를 기록으로 실증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2003년 '데포르타치야: 미스티피카치야' 논문에서 스탈린이 유대인 대량 추방을 계획했다는 통설에 대해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다'고 비판하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입장은 브렌트·나우모프의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와 대비되는 대표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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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항공산업 인민위원회에 관한 후보자 학위논문 심사 통과
1994『붉은 파라오의 포로』 출간
2001『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 출간 (2003년 개정판)
2003러시아 유대인공동체연맹 '올해의 인물 5762' 선정
2008박사학위 논문 심사 통과: 소련 정치 지도부와 유대계 인텔리겐치야(1936–1953)
우리는 지금 케네디가 몰랐던 것을 안다. 소련은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 외에 전술핵무기 100기를 쿠바에 배치했고, 현지 소련군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추가 승인 없이도 이를 발사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로, 1971년 저서 『결정의 본질』에서 합리적 행위자·조직 과정·관료정치라는 세 분석 모델을 제시하며 외교정책 결정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설립 학장(1977~1989)으로 이 학교를 세계적 공공정책 대학원으로 키웠고,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로 구소련 4개국 비핵화를 주도해 국방부 최고 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케네디가 위기 당시 핵전쟁 확률을 '3분의 1에서 반반'으로 보았다는 그의 분석은 이후 모든 쿠바 미사일 위기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형성된 경제 메커니즘은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했다」: 1965년 개혁에 대한 평결.
그는 1970년대부터 소련 공식 통계를 독자적 방법으로 재계산하여, 1928~1985년 국민소득 증가가 공식 84.4배가 아닌 6.6배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결과를 도출한 경제학자다. 1987년 바실리 셀류닌과 함께 『노비 미르』에 발표한 「기만적 숫자」는 소련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 현대 경제사』 전집을 집필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성취와 실패를 냉철히 분석했고, 1965년 코시긴 개혁에 대해서는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한 개혁'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낸시 치안은 개발경제학·정치경제학·경제사를 넘나들며 제도와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효과를 대규모 자료와 엄밀한 실증분석으로 연구한 경제학자다. 중국 경제와 권위주의 국가를 다룬 연구로 알려졌으며, 성별 격차와 교육, 기근의 정치경제를 연결해 분석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 나탈랴 나우멘코와 함께한 2021년 연구는 우크라이나 기근의 지역별 사망률과 곡물 조달을 비교해 민족적 편향과 중앙계획 조달정책의 역할을 계량적으로 제시했다. 이 작업은 홀로도모르를 생산량만이 아니라 국가의 분배와 강제 조달이 빚은 결과로 파악하는 논쟁에 자료를 보탰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언제나 가져온 것은 상실이었다."
1945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975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소비에트 역사와 기억 정치를 가르쳐 온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다. 『레닌은 살아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숭배』(1983)로 윌슨상을 수상했고, 결정적 저작 『산 자와 죽은 자: 러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숭배의 흥망』(1994)에서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흔들렸음을 실증했다.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을 브리핑한 6인의 소비에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클린턴은 199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일 방문에 앞서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책'이라 평했다.
2025년 연구에서 피보바로프는 산업부 복원이 명목상 중앙집권화였지만 기업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없었다고 밝혔다.
니키타 피보바로프는 소련 경제사와 산업관리 제도의 변화를 연구하는 러시아 역사가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국가경제·행정 아카데미의 응용역사 연구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문서와 제도 설계를 통해 후기 소련 개혁을 분석한다. 2025년 연구에서 그는 코시긴 개혁의 산업부 복원을 추적해,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충돌 속에서 중앙집권화가 처음부터 절충된 형태였고 산업부가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고 논증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창조적 파괴가 부재했기 때문에 1970년대에 이르러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나 MIT 경제학 교수가 된 다론 아제모을루는, 국가 간 번영 격차의 제도적 기원을 규명한 공로로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도경제학의 대표적 학자다. 로빈슨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소련 계획경제 아래 가격은 실물 가치와 유리되어 혁신을 평가할 수 없고, 상여금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되어 기업이 자동화를 기피하게 되므로 코시긴 개혁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포용적 제도 없이 지속적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통찰로 발전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의 스페인에서의 위치를 약점이 아니라 강점에 기반한 것으로 접근해온 것이 이 주제 문헌의 기본적 오류라고 그는 논했다.
오리건 번스 출신. 위스콘신대학-매디슨에서 스탠리 G. 페인의 지도 아래 200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스탈린과 스페인 내전』(Columbia University Press)을 출간하여, 기밀해제된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스탈린의 작전 X가 '엄청난 야심에도 불구하고 작전상 실패'였음을 논증했다. 벨파스트 퀸스대학에서 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며 전간기 유럽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데이비드 마플스는 캐나다의 역사학자로 앨버타대학교에서 벨라루스·러시아·우크라이나의 현대사와 정치를 연구했다. 그는 체르노빌의 사회·정치적 영향을 일찍부터 분석했으며, 사고 직후 출간된 『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와 후속 연구로 핵에너지 정책, 안전, 주민과 국가의 대응을 함께 조명했다. 이후 연구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민족사, 기근, 소비에트 붕괴로 확장되었고, 체르노빌이 소련 해체에 미친 영향은 중요하지만 단일 원인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신중한 평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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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런던대학교 학사
1980앨버타대학교 역사학 석사
1985셰필드대학교 경제·사회사 박사
1987『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 출간
1988『The Social Impact of the Chernobyl Disaster』 출간
브랜든버거는 2004년 논문에서 레닌그라드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공산당 창당' 루머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고 주장해, 정치적 파벌 투쟁으로 보는 기존 해석에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추가했다.
버지니아 리치먼드대학 러시아·소련사 교수. 스탈린 시대 선전·이데올로기와 러시아 민족 정체성의 형성을 연구하며, 『국가 볼셰비즘』(2002)에서 스탈린의 루소중심적 동원 선전이 의도치 않게 근대 러시아 민족 정체성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집필 중인 『스탈린의 후계자 후보들 숙청』은 레닌그라드 사건(1949~1952)에 관한 20여 년의 연구로, 파벌 투쟁·스탈린의 레닌그라드 불신·후견-의뢰 네트워크의 자초라는 세 해석 학파를 정리하면서도 결정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카이브가 여전히 폐쇄적이라고 본다.
『위로부터의 혁명』의 핵심 주장은 소련의 집권 정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늘리려 스스로 체제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M. 코츠는 제도 변화와 정치경제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프레드 위어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경제 붕괴와 대중 봉기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넓히려 체제를 해체한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표 저서인 『Revolution from Above』는 소련의 정체, 페레스트로이카, 자본주의 연합의 형성과 그 이후 러시아를 연결해 해석했다.
리테르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들어, 헝가리군이 남부 방어선을 쌓은 것은 티토 침공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들어오는 서방의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반박했다.
라슬로 리테르는 헝가리의 현대사 연구자로, 정보기관·국가안보와 헝가리-유고슬라비아 관계를 주로 연구했다. 그는 티토-스탈린 분열 뒤 소련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벨러 키라이의 회고를 헝가리와 국제 기록보관소 자료로 재검토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헝가리군의 남부 방어와 전면전 대비를 침공 준비와 구별하며, 스탈린의 군사적 의도를 둘러싼 사료적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 붕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핵심 요인이었다」는 주장으로 그는 이 분야의 표준 인과 틀을 세웠다.
라파엘 레우베니는 이스라엘 출신의 국제정치경제학자로, 인디애나대학교 공공환경대학 교수이다. 1999년 아심 프라카시와 공동 집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붕괴」는 소련-아프간 전쟁이 인식 효과, 군사 효과, 정당성 효과, 글라스노스트 효과라는 네 가지 경로를 통해 소련 해체를 촉발했음을 논증하여 이 분야의 표준적 인과 메커니즘 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연구는 경제 세계화, 기후 이주, 자연자원과 전쟁의 관계, 문명 붕괴 모델링 등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스탈린의 최선의 행동은 '1941년 10월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은 것' 하나뿐이라 말한다.
모스크바에서 역사 교사와 학교 운영자로 일하며 대숙청기 국가보안기관을 연구해 온 역사가다. NKVD 지도부 내부 투쟁을 다룬 첫 연구(2006)에 이어 『「피의 난쟁이」 대 인민의 수령: 예조프의 음모』(2009)와 『스탈린과 NKVD』(2013)를 펴냈고, 대테러의 집행을 지역별 통계 편차와 예브도키모프의 '북캅카스파' 같은 체키스트 집단의 인맥 분석으로 재구성한다. 이 서가에 실린 두 연구서의 저자다.
그동안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료가 마침내 열리자, 그는 역사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회고하며, 다만 그것이 오십 대 중반에야 왔음을 아쉬워했다.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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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