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루이칭

罗瑞卿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06.5.31.–1978.8.3. ↓ 실각 1965 · 자연사

초대 공안부장이자 총참모장, 문화대혁명 전야에 린뱌오의 표적이 되어 실각한 인물

마오쩌둥은 “하늘이 무너져도 키 큰 뤄가 받쳐 준다”며 그를 최측근 경호 책임자로 신임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으로 10년간 공안 체계를 세웠고, 총참모장을 지내다 1965년 말 실각했다.

쓰촨 출신 황푸 6기생으로 홍군 정치·보위 부문에서 일했고 항일군정대학 교육장이었다. 1949년 초대 공안부장이 되어 반혁명 진압운동과 공안 체계를 세웠고, 1959년 펑더화이 실각 뒤 총참모장으로 군을 관리했다. 정치보다 훈련을 앞세운 그는 1965년 말 린뱌오의 고발로 「군권 탈취」를 꾀했다는 비판을 받아 실각했고, 1966년 자살을 기도해 다리를 다쳤다. 1977년 복권되어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서독에서 수술 후 사망했다.

다른 이름: 나서경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77~1978년, 진리 기준 논쟁을 지원하다

1977년 8월 뤄루이칭은 실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장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열린 중국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열두 해에 걸친 박해와 치료, 절단 수술 뒤의 복귀이자, 그가 맡은 마지막 공직이었다.

1978년 3월 26일 《인민일보》가 「기준은 하나뿐이다」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뤄루이칭은 이 글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이 실천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해방군보》 책임자를 불러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은 진리이지만 진리를 검증하는 데 쓸 수는 없고 오직 실천만이 그 기준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군보가 이 관점을 선전하고 지지하라고 지시했다.

5월 11일 《광명일보》가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기준이다」를 발표하고 다음 날 《인민일보》와 《해방군보》 등 여러 신문이 이를 전재하자 논쟁이 격해졌다. 뤄루이칭은 《해방군보》에 무게 있는 평론을 실으라고 지시하고, 당교에서 작성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원고가 해당 논점을 다루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여러 차례 수정을 지도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실천론》 등과 덩샤오핑의 관련 논의를 직접 확인하고 두 사람의 관련 서술을 인용하도록 권했으며, 원고를 두고 후야오방과 여섯 차례 전화로 상의한 끝에 6월 24일 《해방군보》 특약 평론으로 게재하게 했다. 같은 날 《인민일보》와 《광명일보》도 이를 실었다.

논쟁을 둘러싼 압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뤄루이칭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해 7월 서독에서 다리 수술을 받으러 떠나기 전에도 《해방군보》 책임자에게 같은 뜻을 전했다. 그가 서독에서 사망한 1978년 8월은 진리 기준 논쟁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던 시기였고, 같은 해 12월 제11기 삼중전회가 「두 개의 무릇」을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