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Спиридонова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이자 농민 대변자: 볼셰비키에 맞선 마지막 혁명적 야당 지도자

"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 때문에 이 결행을 맡았다... 루제놉스키 이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으며 사는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 1906년 재판에서의 진술

러시아 혁명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여성 지도자 중 한 명. 1906년 농민 탄압을 주도한 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를 암살한 후 전국적 민중 영웅이 되었고, '인민의 변호인'으로 불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좌파 사회혁명당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과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될 정도로 막대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1918년 여름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에 가담했으며, 이후 스탈린 시대 25년간 투옥·유배를 거듭하다 1941년 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8년 11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

1918년 7월 좌파 에스에르 봉기 실패 후 크렘린에 구금된 스피리도노바에게 볼셰비키 지도부는 공개 재판을 열어 그녀의 도덕적 위신을 분쇄하려 했다. 그녀는 '당파 재판'을 신뢰할 수 없다며 출석을 거부하는 대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앞으로 장문의 공개서한을 썼다. 이 서한은 단순한 변론이 아니라 볼셰비키 권력에 대한 정면 기소장이었다.

스피리도노바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배반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지방 소비에트의 자유로운 선거를 무력으로 짓밟고, 우파 사회주의자들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추방하며, 농민의 곡물을 강제 징발하기 위해 도시 노동자를 무장시켜 마을로 보내는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것은 '국유자본주의'였고, 진정한 사회화가 아니었다.

서한의 핵심은 소비에트 권력 자체의 원리에 대한 옹호였다. 그녀는 '소비에트는 민중과 결합된 바로미터처럼 민감해야 하며, 그러려면 무조건적인 선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썼다. 농민이 자신의 소비에트 대의원을 구타하거나 추방하는 것을 '적색 테러, 민중의 자위'라고 불렀으며, 공장과 마을 단위의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야말로 혁명의 진정한 창조적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볼셰비키가 '당파 재판'으로 자신을 심판하려 해도 국제 노동운동과 '역사의 평결'에 호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서한은 10월 혁명의 동지였던 좌파 혁명가가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를 혁명 내부에서 비판한 가장 초기의 중요한 문건 중 하나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반복되는 핵심 긴장(당 권력 대 대중 자치)을 이미 1918년에 날카롭게 포착했다.

1906년 루제놉스키 암살과 순교자적 아이콘의 탄생

1906년 1월 16일, 21세의 에스에르 전투분대원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보리소글렙스크 역에서 탐보프 부지사 고문 가브릴 루제놉스키에게 권총 다섯 발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 루제놉스키는 농민 봉기 진압 과정에서 코사크 기병대를 동원해 마을 단위 집단 태형을 조직한 인물로, 탐보프 에스에르 위원회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스피리도노바가 스스로 집행을 자원했다.

체포 직후 그녀는 코사크 경호대에 의해 나체로 벗겨진 채 구타당하고 담뱃불로 지져졌으며, 탐보프로 호송되는 열차 안에서는 헌병 장교 아브라모프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 충격적인 학대는 그녀가 감옥에서 몰래 빼낸 편지가 2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유주의 신문 ≪루시≫에 게재되면서 전국적 스캔들로 폭발했다. 이 사건은 한 아름답고 순결한 상류층 여성이 가학적 관료를 처단하고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서사로 제정 러시아 전역의 여론을 뒤흔들었다.

3월 11일 군사법원은 그녀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16일 동안 스피리도노바는 빵 부스러기로 작은 인형을 빚어 머리카락으로 매달아 흔들며 자신이 과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지 시험했다고 한다. 3월 28일, 대중적 항의와 국제적 관심 속에 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해 7월, 스피리도노바는 다섯 명의 여성 테러리스트 동료들(알렉산드라 이즈마일로비치, 아나스타시야 비첸코, 리디야 예제르스카야, 레베카 피알카, 마리야 시콜니크)과 함께 '셰스툐르카(6인조)'로 불리며 시베리아 네르친스크 카토르가로 이송되었다. 한 달에 걸친 열차 이송은 그대로 개선 행진이 되었다: 경유하는 역마다 수천의 군중이 몰려들어 '에스에르의 성모'를 보기 위해 밤낮으로 기다렸고, 노동자들은 구리 동전을, 부인들은 반지를, 제대 군인은 담배를 창문 너머로 건넸다. 이즈마일로비치의 회고에 따르면, "누가 그녀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그녀의 이름은 에스에르당만이 아니라 모든 항의하는 자들의 깃발이었다." 스피리도노바는 아직 22세였으나, 이미 제정을 넘어 혁명 자체의 산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농민 사회주의와 좌파 에스에르의 혁명 전략, 1917~1918년

스피리도노바의 1917~1918년 정치는 농민을 혁명의 수동적 지지층이 아니라 토지와 소비에트를 통해 스스로 질서를 만드는 주체로 본 데서 출발했다. 2월 혁명 뒤 그녀는 좌파 사회혁명당의 조직과 선전에 참여하며 전쟁 중단, 토지의 농민 이양, 소비에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주장했고, 농민대표대회에서 좌파의 영향력을 넓혔다.

좌파 에스에르는 토지 문제와 평화 문제에서 볼셰비키와 협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토지 소유를 사회화하는 제도와 농촌의 자치적 조직을 혁명의 핵심으로 여겼고, 스피리도노바는 1917년 11월 당 창립대회에서 대중을 이끄는 세력과의 긴밀한 접촉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협력은 농촌의 요구를 국가 정책으로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지만, 양당은 통치 방식과 혁명의 국제적 전망에서 점점 갈라졌다.

1918년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결별이 아니었다. 좌파 에스에는 농민의 자발성과 소비에트의 선출성을 중시했지만, 볼셰비키의 곡물 징발과 빈농위원회 정책은 농촌에 당과 국가의 강제력을 직접 확대했다. 역사학자 에토레 친넬라는 좌파 에스에르가 토지 사회화의 제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미르바흐 암살과 즉각적인 세계혁명에 대한 비타협적 기대가 당의 정치적 붕괴를 재촉했다고 분석한다. 스피리도노바의 노선은 따라서 농민 주체성과 혁명적 국제주의를 결합하려 했으나, 내전의 국가화된 통치와 그 결합의 긴장을 해결하지 못한 정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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