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 오시포비치 마르토프

Юлий Осипович Мартов
소련 튀르키예 1873–1923 → 망명지 사망

레닌의 가장 오랜 벗이자 가장 원칙적인 적수

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03년 여름, 가장 가까운 동지와의 결별

율리 마르토프는 레닌의 가장 가까운 초기 동지였다. 1895년 두 사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함께 만들었고, 나란히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살았으며, 1900년부터는 망명지에서 『이스크라』를 함께 편집했다. 동지들은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여겼다.

1903년 여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두 사람은 당규 제1조를 놓고 갈라섰다. 마르토프는 당의 문을 넓게 열어 당의 지도 아래 정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고, 레닌은 당원이라면 당 조직 하나에 직접 몸담아야 한다고 맞섰다. 표결에서는 마르토프가 이겼으나, 분트와 「경제주의자」 대표들이 퇴장한 뒤 중앙기관 선거에서 레닌파가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고 마르토프파에게는 소수파(멘셰비키)라는 이름이 남았다.

규약 한 조항의 차이는 곧 당 개념 전체의 차이로, 나아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두 흐름으로 자라났다. 결별은 정치적이었으나 상처는 개인적이었다. 훗날의 회고들은 레닌이 마르토프와의 절교를 오래도록 아파했다고 전한다.

1917년 10월, 혁명 안의 반대파로 남다

전쟁이 터지자 마르토프는 멘셰비키 안에서도 국제주의 좌파에 섰다. 그는 방위주의를 거부하고 침머발트 반전 회의에 참가했으며, 1917년 내내 전쟁 계속에 반대했다. 10월 봉기의 밤(신력 11월 7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그는 유혈을 피하기 위해 모든 사회주의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제안했다. 제안이 묻힌 채 퇴장하는 그의 등 뒤로 트로츠키의 유명한 말이 날아들었다. 「당신들의 자리는 이제부터 역사의 쓰레기통이오.」

그러나 마르토프는 반혁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에 남아 합법 야당으로서 탄압과 적색테러를 비판하는 동시에, 백군과 외국 간섭에 맞서 혁명을 방어하라고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1919년에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0년 병든 몸으로 합법적으로 출국한 그는 베를린에서 『사회주의 통보』를 창간했고, 1923년 4월 4일 결핵으로 숨졌다.

크룹스카야의 회고에 따르면, 이미 병석에 누운 레닌은 옛 동지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은 채 마르토프의 병세를 물었다. 「마르토프도 죽어가고 있다지.」 평생을 갈라져 싸운 두 사람은 한 해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고, 마르토프는 혁명을 배신하지 않은 비판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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