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코시 마차시

Rákosi Mátyás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2–1971 ○ 사망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살라미 전술'과 일당 독재의 구축 (1945–1949)

라코시의 권력 장악 방식은 그 스스로 '살라미 전술(szalámitaktika)'이라 명명한 단계적 제거 전략으로 요약된다. 1945년 총선에서 소상공당이 57%를 득표하자, 라코시의 공산당은 '얇게 썰 듯' 연립정부 내 파트너들을 하나씩 분쇄해 나갔다. 먼저 좌파 블록을 결성해 소상공당을 분열시키고, 이어 1947년 새 선거법으로 약 50만 명(유권자의 8.5%)의 선거권을 박탈했다. 그해 총선에서 공산당은 22.25%로 원내 1당이 되었고, 13.4%를 득표한 헝가리 독립당은 선거 사기 혐의로 금지되었다. 1948년 6월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헝가리 노동인민당(MDP)을 출범시켰으며, 1949년 5월 단일 명부 선거에서 97%를 득표해 공식적인 일당 지배를 완성했다.

이 과정의 정점은 1949년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 내무장관에 대한 공개 재판이었다. 러이크는 라코시의 잠재적 경쟁자였으며, 반파시스트 투쟁 경력이 뛰어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티토주의'와 '시온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9년 9월 극적인 쇼 재판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은 동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숙청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라코시는 이를 통해 당내 불복종을 원천 봉쇄했다. 스탈린은 라코시를 '최고의 헝가리 제자'라 불렀고, 헝가리는 소비에트화의 모범 사례로 간주되었다. 라코시의 살라미 전술은 이후 동유럽 여타 국가에서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표준적 방법론으로 참조되었다.

스탈린 사후의 위기와 라코시의 몰락 (1953–1956)

1952년 말 라코시는 스탈린의 마지막 숙청을 흉내 내고 있었다. 1953년 2월 말 그는 중앙지도부에 국가보안기관(ÁVH) 수장 페테르 가보르와 여러 간부의 체포를 알렸고, 정치위원 코바치 이슈트반과 버시 졸탄은 비판받고 지방으로 밀려났다. 모두 유대계였다. 스탈린이 죽은 뒤 5월 말 모스크바에 불려 간 그는 지도부를 개편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부총리 후보를 추천하라는 요구에 모든 이름에 이의를 달았다.

6월 13일 크렘린 회담에서 라코시는 「숙제」를 거의 끝냈다는 듯 보고했다. 말렌코프는 곧바로 「헝가리 동지들이 결함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받았다. 베리야는 그가 직접 ÁVH를 지휘하고 구타까지 명령했다고 비난하며 총리는 헝가리인이 맡는 편이 낫다고 했고, 흐루쇼프는 「라코시 동지는 집단적으로 일할 줄 모른다」고 했다. 굴욕을 당한 라코시는 너지의 총리 임명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16일에는 「이런 가르침을 더 일찍 받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귀국 뒤에도 실무는 그의 손에 있었다. 동베를린 봉기 소식이 전해진 6월 20일 정치위원회에서 그는 즉시 방향을 틀지 않으면 가장 심각한 위기가 온다고 인정했다. 6월 27일 중앙지도부 회의에서는 개인숭배, 권력 집중, 헝가리 출신 간부 소외를 스스로 고발하는, 경력에서 가장 자기비판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회의 도중 모스크바에서 결의를 공개하지 말라는 전화가 왔다며, 조치를 당 결의가 아닌 새 정부의 강령으로 국회에서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이 방식 덕분에 그에 대한 비판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서기장 직함은 없어졌지만 그는 제1서기로 당을 계속 이끌었다.

베리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7월 9일 정치위원회에 전해지자 그는 다시 힘을 얻었다. 7월 11일 부다페스트 당 활동가 집회에서 생중계된 연설에서 그는 비판을 짧게 넘기고 공업화와 협동조합 우선 같은 옛 목표를 되풀이했으며, 「당의 이름으로 먼저 과업을 발표하는 편이 현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새 노선을 공개적으로 막지 않는 대신 철저한 「분석」을 요구하며 이행을 늦추었다. 베리야는 그해 12월 23일 처형되었다.

1955년 초 모스크바에서 말렌코프가 밀려나자 반격은 성과를 냈다. 3월 9일 중앙지도부는 너지의 「우경 편향」을 규탄했고, 4월 18일 너지는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56년 2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로 라코시의 입지는 치명적으로 흔들렸다. 3월 23일 에게르에서 그는 러이크 재판이 조작이었음을 인정했고, 7월 18일 중앙지도부는 그를 해임하고 게뢰 에르뇌를 후임 제1서기로 세웠다. 그는 소련으로 떠나 다시 헝가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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