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앎의 관계를 파고들어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를 쓴 프랑스의 철학자
1976년 『성의 역사』 제1권에서 근대 사회가 성을 억압해 왔다는 「억압 가설」을 따져 묻고, 권력이 성을 앎과 규범의 대상으로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
푸아티에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에서 이폴리트와 알튀세르에게 배운 프랑스의 철학자·사상사가. 1950년 알튀세르의 권유로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갔으나 당내의 동성애 혐오와 「의사들의 음모」 사건의 반유대주의에 실망해 1953년 떠났다. 웁살라·바르샤바·함부르크의 프랑스 문화 기관에서 일한 뒤 『광기의 역사』(1961), 『말과 사물』(1966)을 냈고,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다. 감옥 정보 그룹을 세우고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976~1984)로 권력과 앎의 관계를 분석했다. 1984년 에이즈 합병증으로 파리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폴미셸 푸코
주요 활동과 소속
푸아티에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까지
1926년 10월 15일 푸아티에의 유복한 집안에서 셋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앙리 4세 고등학교와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장 이폴리트와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았고, 소르본에서 철학과 심리학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의 권유로 1950년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갔지만 당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계급투쟁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 안에서 그는 동성애 혐오를 직접 겪었고, 1952~1953년 소련의 「의사들의 음모」 사건에서 드러난 반유대주의에 경악해 1953년 당을 떠났다. 그래도 평생 알튀세르의 친구이자 옹호자로 남았다. 1955년부터 다섯 해 동안 외국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웁살라 대학의 문화 외교관이자 메종 드 프랑스 책임자로, 1958년 10월부터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바르샤바 대학 프랑스 센터장으로, 1958~1960년에는 함부르크 프랑스 문화원장으로 지냈다.
프랑스로 돌아와 첫 주저 『광기의 역사』(1961)를 냈고, 클레르몽페랑 대학에 있던 1960~1966년 『임상의학의 탄생』(1963)과 『말과 사물』(1966)을 써서 그가 「고고학」이라 부른 방법을 다듬었다. 1966~1968년 튀니스 대학에서 가르친 뒤 실험 대학인 파리 제8대학 철학과장이 되어 『지식의 고고학』(1969)을 냈고,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권력·성·정치 참여
1971년 2월 그는 역사가 피에르 비달나케, 언론인 장마리 도므나크와 함께 감옥 정보 그룹을 세워 감옥의 실태를 알리고 수감자에게 목소리를 주려 했다. 같은 해 텔레비전 토론에서 놈 촘스키와 맞서, 고정된 인간 본성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이어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1976)에서 고고학과 계보학의 방법으로 권력이 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분석하고, 주권 권력·규율 권력·생명 권력을 구별했다.
『성의 역사』 제1권은 그가 「억압 가설」이라 부른 통념을 따져 물으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이론을 모두 물리쳤다. 1977년 5월에는 동성애의 동의 연령을 이성애와 같게 21세에서 15세로 낮추자는 의회 청원에 서명했다. 1978년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칼럼을 위해 테헤란을 찾아 이란 혁명을 취재했고, 호메이니의 이슬람주의 운동에 경탄한 글로 프랑스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폴란드 연대 노조를 지지했다.
1984년 6월 25일 그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파리에서 숨져 이 병으로 죽은 프랑스 최초의 공인이 되었고, 그의 동반자 다니엘 드페르는 그를 기려 에이즈 지원 단체 AIDES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