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관련 역사 사건
1922년 프리아무르 젬스키 보예보다의 국가 구상
1922년 8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 젬스키 소보르는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결정하고 디테릭스를 임시 독재자로 선출했으며, 8월 8일 그는 프리아무르 국가 통치자로 공식 선포되어 그 명칭을 프리아무르 젬스키 지방으로 바꾸는 칙령을 냈다. 젬스키 보예보다로서 그는 젬스카야 라티로 개편한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노동조합과 무슬림 대표를 각 1명씩 포함한 자문 기구 젬스카야 두마를 소집하도록 명했다. 8월 15일 칙령에서 그는 장래 국가 구성을 교회 교구를 기본 자치 단위로 삼는 형태로 제시했는데, 비신자는 프리아무르 젬스키 지방의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되며, 교구는 사제와 주민 가운데 임명된 의장이 관장하고, 25세 이상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추첨으로 선출된 교구 평의회가 행정·경제·교육·사법·재정 문제를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이 종교적·계급적 질서 구상은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9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극동 민족 조직 대회를 열어 지지를 얻고 총동원령, 반볼셰비키 승리를 위한 교회 기도, 대규모 헌금령을 잇달아 냈으나, 상공회의소와 민간 기업은 자금을 거부했고 동원 대상자 상당수는 하얼빈·한국·캄차카·농촌으로 도피하거나 폴란드·루마니아 시민권을 사들였으며, 일본 외교관들은 탄약 제공을 거부해 약 360명의 의용병이 무기 없이 남았다. 디테릭스는 동원 기피자에 대한 처벌을 금지했지만, 공산주의자·사회주의 인터내셔널리스트 당원과 그 가족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극동 공화국으로 추방했다. 1922년 10월 14일 모나스티리셰 부근에서 젬스카야 라티가 극동 공화국군에 패배하면서 물러났고, 10월 20일 그는 약 7천 명의 병사와 가족과 함께 포시예트로 이동해 일본 수송선으로 대피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에 정착했고, 1930년에는 러시아 전군 연합 극동 지부 의장이 되었다. 별세 연도는 1937년으로 기록되지만 정확한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다. 러시아어 자료는 10월 9일, 영어 자료는 9월 9일로 적고 있어 어느 쪽도 단정하지 않는다. 사망 후 그는 상하이 류자웨이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그 묘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