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G. 그리고리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Григорьевич Ефрем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97–1942 ✕ 자살

모스크바 방어전의 33군 사령관, 스탈린의 퇴각 거부로 뱌지마에서 포위되어 자결하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38년 국가보안기구 조사와 석방

1937~1938년 붉은 군대 지도부에 대한 대숙청이 진행되던 시기, 예프레모프도 그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8년 그는 급히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모스크바' 호텔에 배치된 뒤, '인민의 적' 투하쳅스키와의 연계 혐의로 국가보안기구 요원들에게 가택연금되었다. 심문은 두 달 반 동안 이어졌다. 전 프리볼가 군관구 사령관 드이벤코와의 대질 심문에서 그는 1937년 4월 쿠이비셰프에서 자신이 드이벤코에게 포섭되었다는 진술을 듣게 되었다.

막다른 상황에서 예프레모프는 1938년 4월 17일 보로실로프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고, 한 달 뒤에는 바쿠 장갑열차 습격 당시의 동지였던 미코얀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는 스탈린이 배석한 심문을 거친 뒤에야 풀려났다. 미코얀의 아들 세르고는 훗날 예프레모프의 석방이 자기 아버지의 직접적인 공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석방된 그는 그해 10월 7일 국방인민위원 부속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숙청의 와중에서도 군 지도부의 일원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대숙청이 어떻게 무고한 지휘관까지 삼켰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어떤 경로로 사람이 살아 나왔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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