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라셰비치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Лашевич
소련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소련 러시아 1884–1928 사망 경위 논란

1917년 봉기와 내전을 지휘한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

1917년 10월 24일 저녁, 라셰비치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벨리셰프를 통해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고, 이 임무는 완수되었다.

1884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1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5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에 올랐으나 1926년 통합 반대파 가담 뒤 강등되어 1926~1928년 하얼빈 중동철도에서 일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26년 숲속 불법 집회 — 통합 반대파의 분수령

1926년 6월 6일, 라셰비치는 모스크바 근교 돌고프루드나야 역 부근 숲에서 통합 반대파 지지자들의 비밀 집회를 조직하고 기조 보고를 맡았다.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 활동이 금지된 이래, 반대파가 당 기구의 통제 밖에서 독자적인 집회를 연 것은 이례적인 도전이었다. 라셰비치는 이 자리에서 중앙위원회 지도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보고를 했고, 참석자들은 당의 관료화와 네프 아래 사회적 분화에 대한 우려를 논의했다.

스탈린파는 이 집회를 '반당 분파 활동'의 결정적 증거로 삼았다. 1926년 7월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전원회의는 '당의 통일에 관하여' 결의 제7조(분파 활동 중앙위원 축출 조항)를 사상 처음으로 발동해 라셰비치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제명하고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직에서 해임했으며, 2년간 책임 있는 당직을 맡지 못하도록 했다. 지노비예프 역시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이 사건은 통합 반대파에 대한 전면적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고, 이후 1년 반 동안 지속된 공개적·행정적 숙청의 서막이었다.

하얼빈 '명예 유배'와 중동철도 1926~1928

1926년 7월 전원회의 뒤 라셰비치는 "명예 유배" 조치의 하나로 11월 하얼빈으로 보내져 중동철도 이사회 부의장(토바리시치, 즉 소련 측 대표)에 임명되었다. 1924년 소련-중국 협정에 따라 이사장은 중국인, 토바리시치는 소련인이 맡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이는 형식상 요직이었고, 11월 11일 정치국에서 상정되어 20일 확정되었다. 하얼빈 러시아 이민 언론은 이 임명을 반대파 인사의 유배로 읽었다.

라셰비치는 12월 10일 아내 이다 블라디미로브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 중동철도 문제를 양측 이익을 고려하며 처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는 중동철도에서 소련 측 최고 대표였고, 신시가지 중심의 이사회 저택과 연봉 2만 1천 루블을 받았다. 1927년 1월 4일 오르조니키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방 열 개짜리 집과 중국인 하인 셋, 연회·접대와 예복 차림을 요구받는 처지를 불평하며 "온갖 인간쓰레기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이민 사회는 그를 교수형 집행인·살인자로 기억했고, 일부는 1918년 여름 페름 대주교 안드로니크 살해에 그가 연루되었다고 여겼다. 1927년 6월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준비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토바리시치로서 그는 "적지 않은 재치와 특유의 집요함"을 보이며 일종의 "부르주아 교섭자"처럼 행동했고, 즉결 판단이 필요한 사안을 끌면서 중국 측 행정부와의 직접 충돌을 피했다. 그는 중동철도 최고 경영진의 질서를 일시적으로 회복하고 소련-무크덴 관계에 상대적 균형을 만들어냈으며, 철도 금고 유지 문제와 학교 문제 등을 정리했다. 1927년 11월 19일 하얼빈의 미국 영사관 보고에 따르면 그는 중동철도 상황을 검토한 뒤 소련 지도부에 이민 정책 전환을 제안했다. 즉 현지 러시아인 사회와 긴밀히 접촉해 반소 활동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소련 국적을 취득해 중국 측에 맞서 소련 기관과 협력하도록 이끌자는 것이었다. 예술계에서도 그는 후원자로 기억되었다. 중동철도 이사회는 하얼빈이 자랑하던 오페라를 비롯한 극장에 큰돈을 썼고, 라셰비치 아래에서 많은 예술가와 기술자가 소련에서 왔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1928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그의 복귀는 예술계를 들뜨게 했다.

그는 소련에서의 정치 경력이 끝났다고 보지 않았다. 1927년 10월 말 하얼빈에서 레닌그라드로 가 11월 7일 반대파의 대안 시위에 참가했고, 그해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활동가로 출당되었다. 그럼에도 1928년 1월 19일 정치국은 그를 중동철도 이사회 부의장직에 유임하기로 했고, 6월에는 당적이 회복되었다. 그는 2월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며 철도 문제에 다시 관여했다. 5월 23~28일에는 보리스킨 등과 함께 내몽골 할룬아르샨 휴양지로 여행했는데, 이 여행을 두고 일본 신문은 군사적 목적의 도로 정찰이라는 설을 제기했고 외국 언론은 그가 몽골인들에게 200만 금루블을 가져가 봉기를 조직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같은 여행에서 차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고 보리스킨이 크게 다쳤으며 라셰비치는 가볍게 다쳤다. 연구자 크로토바는 이런 유언비어와 판본들이 다른 사료로 확인되지 않으며 사건에서 라셰비치의 역할은 불분명하다고 강조한다.

1928년 8월 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경위뿐 아니라 날짜를 두고도 논란이 되었다. 대부분의 참고문헌은 8월 30일로 적지만, 타스는 이사회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월 31일 4시 40분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공식적으로는 9월 1일 게케르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타스 특파원은 왼쪽 다리의 괴저성 병변과 전신 중독에 기반한 심장 기능 부전을 사인으로 전했다. 그러나 공식 사인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중독설과 자동차 사고 후유증설, 과음설이 즉시 나돌았으며 일부 현대 연구자는 자살이라고 서술한다. 하얼빈 주재 미국 영사 핸슨이 1928년 8월 30일 국무부에 전한 또 다른 판본에 따르면, 8월 14~16일 소련 총영사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서류가 든 가방이 사라진 뒤 그가 몸져누웠고 심부전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가 실패해 두 주 뒤 사망했다. 시신은 레닌그라드로 옮겨져 화성(마르스 광장)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예포가 발사되었으며, 1930년대 중반 묘비가 철거되었다가 나중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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