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스탈린 사후 헝가리 '새 노선'을 주도한 개혁 공산주의자. 1956년 봉기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에 체포돼 58년 처형, 89년 재매장은 체제 전환의 상징이 됐다.
경력 연표
-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관련 역사 사건
1953년 6월, 부다페스트의 새 노선
너지 임레는 헝가리 커포슈바르 태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1916년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혁명을 만난 그는 1917년 이후 볼셰비키에 가담해 적위대원으로 내전을 치렀고, 이후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헝가리로 돌아가 지하활동을 하다 1930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모스크바에서 농업 문제를 연구하는 이론가로 일했다. 1944년 말 붉은군대와 함께 귀국한 그는 임시정부의 농업장관으로서 1945년 3월의 토지개혁을 집행했다. 대영지를 해체해 60만이 넘는 농민 가구에 땅을 나눠 준 이 개혁으로 그는 「땅을 나눠 준 장관」으로 불리며 농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6월, 모스크바의 새 지도부는 헝가리 지도부를 크렘린으로 불러 라코시의 강행 공업화와 대량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너지를 총리로 내세웠다. 너지의 「새 노선」은 수용소와 강제수용 체계를 폐쇄하고, 정치범을 사면했으며, 콜호스 탈퇴를 허용하고 소비재와 생활수준에 무게를 옮겼다. 헝가리 사회는 숨을 돌렸다.
그러나 1955년 초 모스크바에서 말렌코프가 밀려나자 라코시가 반격했다. 너지는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자아비판을 거부했고, 사회주의적 합법성과 각국의 조건에 맞는 사회주의의 길을 옹호하는 글들을 썼다. 이 시기의 너지는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 당 안에서 개혁을 요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집은 개혁을 바라는 당내 지식인들의 구심점이 되어 갔다.
1956년 10월, 두 주일의 총리와 1958년의 재판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대중 봉기로 번지자, 당 지도부는 그날 밤 너지를 다시 총리로 불러냈다. 이후 열이틀 동안 그는 봉기한 거리와 소련군, 무너져 가는 당 기구 사이에서 사태를 헌정적 궤도에 올려놓으려 분투했다. 그는 봉기를 「민족적, 민주주의적 운동」으로 재규정하고 정치경찰을 해산했으며 다당제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말린 노트가 보여주듯 소련 간부회는 10월 30일 협상과 철군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화국광장에서 벌어진 보안요원 린치, 블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수에즈 전쟁의 국제 정세 속에서 10월 31일 결정을 뒤집었다. 소련군의 재진입이 시작되자 11월 1일 너지는 중립을 선언하고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발표하며 유엔에 호소했다.
11월 4일 새벽 「회오리바람 작전」이 시작되었고,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서면으로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대사관을 나선 그는 그러나 소련군에 연행되어 루마니아 스나고프로 이송되었다. 1958년 6월 부다페스트의 비공개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며 사면 청원을 거부했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역사에 맡긴다고 말했다. 1958년 6월 16일 처형된 그는 감옥 마당에, 뒤에는 공동묘지 301구역에 표지 없이 묻혔다.
문서고 개방 이후의 연구는 이 재판이 복원된 헝가리 지도부가 주도하고 모스크바가 용인한 정치 재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 20만 명이 모인 가운데 너지의 재장례가 치러졌고, 헝가리 대법원은 그를 완전히 복권했다. 1956년은 냉전의 어느 쪽 신화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극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볼셰비키가 된 이 헝가리 농업학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고, 그의 처형은 사회주의 운동 자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결정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