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3–1955 정부·행정 · 헝가리
경력 연표
-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오스트리아-헝가리군 징집병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1916년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적군 적위대원볼셰비키에 가담해 적위대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 1944–1949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농업장관, 토지개혁 포고의 기초자1945년 3월 토지개혁 포고를 기초했고,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내무장관을 지낸 뒤 국회의장이 되었다.
- 1953–1956스탈린 사후 동유럽의 위기, 1953–1956헝가리 총리1953~1955년 새 노선을 이끌었고 1956년 혁명 정부를 이끌다 1958년 처형되었다.
- 1953헝가리의 새 노선총리, 새 노선의 주창자크렘린 회담에서 쿨라크 명부 폐지를 관철하고 7월 4일 강령 연설로 적법성과 생활수준을 약속했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헝가리 혁명의 총리1956년 10월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군에 체포되어 2년 후 처형됐다.
- 1956헝가리 혁명혁명의 총리, 처형되다다당제와 중립을 선언한 개혁 총리로 1958년 비밀리에 처형됐다.
1953년 6월, 크렘린에서 시작된 새 노선
너지 임레는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고,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다. 그러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기회주의」로 몰려 정치국에서 밀려났다.
1952년 여름 흉작과 무리한 계획으로 농촌에서 탈곡 파업과 공출 거부가 번지자, 부총리였던 너지는 당 서기국에 곡물 자유 거래를 다시 허용하자고 제안했다. 1953년 6월 12일 헝가리 대표단 8명이 크렘린에 불려 갔을 때, 소련 지도부가 긍정적으로 언급한 헝가리 지도자는 그 한 사람뿐이었다. 베리야는 1949년 그를 배제한 것이 옳지 않았다고 말하며 「농업을 아는 헝가리인」 너지를 각료회의 의장감으로 처음 거명했다. 너지는 문제의 근원을 「대중으로부터의 괴리」에서 찾았고, 라코시·게뢰·퍼르커시 세 사람이 서기국도 모르게 결정을 내려 왔다고 지적했다. 16일 회의에서 그가 고집한 쿨라크 명부 폐지는 이틀 동안 소련 측이 받아들인 유일한 헝가리 쪽 제안이었다. 이틀 동안의 발언은 헝가리 대표단이 받아 적은 1953년 6월 모스크바 회담 기록에 남아 있다.
6월 27~28일 중앙지도부 회의에서 너지는 결의안을 소개하며 소련 지도부의 비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오류의 뿌리는 겉보기보다 훨씬 깊고, 경제정책은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이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법칙을 지키지 못한 「모험주의」였다고 말했다. 그는 「절반의 조치」에 그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결의는 공개되지 않았고, 조치는 새 정부의 강령으로만 발표되었다.
7월 4일 총리로 선출된 너지의 국회 연설은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는 5개년 계획의 상향된 목표가 힘에 부친다고 인정하고, 공업 자급자족 추구를 버리며 개인 농가의 생산과 소유를 보장하고 개인 수공업자에게 영업 허가를 내주겠다고 했다. 지식인에 대한 의심과 교회에 대한 행정적 압박을 끝내겠다고 했고, 고등교육보다 「미래의 희망, 어린 헝가리인들」의 초등학교에 투자하자고 했다. 가장 무게가 실린 대목은 사법·경찰·지방평의회가 국민의 정의감을 해쳤다고 인정하며 합법성을 네 번 강조한 부분이었다. 라이너는 이것이 1945년 이후 다수 국민이 동의한 공산주의 지도자의 첫 연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베리야 실각 뒤 라코시가 7월 11일 당 활동가 집회에서 옛 구호를 되살리자, 너지는 7월 16일과 25일 소련 대사 키셀료프를 만나 당 기구와 지도부에 반대가 있다고 알렸다. 소련 당은 곧 헝가리 측에 경과 보고를 요구했다. 7월 24일 사면은 2년 이하 형을 면제했지만 대부분의 정치범은 제외했다. 그래도 가을까지 억류수용소와 호르토바지 강제이주지가 닫혔고, 농업협동조합 탈퇴도 까다로운 조건 아래 허용되었다.
너지는 이 전환을 인민민주주의적 이행기가 부당하게 단축된 데 대한 교정으로 설명했다. 모델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앞서 나간 발전을 더 느리지만 확실한 길로 되돌리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라이너가 지적하듯, 되돌아갈 인민민주주의의 구조는 이미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955년 1월 8일, 같은 크렘린에서 소련공산당 간부회는 너지의 1954년 10월 20일 논문과 「새 단계」라는 규정을 반당적이라 규탄하고 라코시를 다시 지지했다. 보로실로프·불가닌·흐루쇼프는 차례로 그에게 당과 함께하든지 당에 맞서든지 두 길뿐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의 발언은 1955년 1월 간부회의 너지 비판 기록으로 전한다.
1956년 10월, 두 주일의 총리와 1958년의 재판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대중 봉기로 번지자, 당 지도부는 그날 밤 너지를 다시 총리로 불러냈다. 이후 열이틀 동안 그는 봉기한 거리와 소련군, 무너져 가는 당 기구 사이에서 사태를 헌정적 궤도에 올려놓으려 분투했다. 그는 봉기를 「민족적, 민주주의적 운동」으로 재규정하고 정치경찰을 해산했으며 다당제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말린 노트가 보여주듯 소련 간부회는 10월 30일 협상과 철군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화국광장에서 벌어진 보안요원 린치, 블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수에즈 전쟁의 국제 정세 속에서 10월 31일 결정을 뒤집었다. 소련군의 재진입이 시작되자 11월 1일 너지는 중립을 선언하고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발표하며 유엔에 호소했다.
11월 4일 새벽 「회오리바람 작전」이 시작되었고,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서면으로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대사관을 나선 그는 그러나 소련군에 연행되어 루마니아 스나고프로 이송되었다. 1958년 6월 부다페스트의 비공개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며 사면 청원을 거부했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역사에 맡긴다고 말했다. 1958년 6월 16일 처형된 그는 감옥 마당에, 뒤에는 공동묘지 301구역에 표지 없이 묻혔다.
문서고 개방 이후의 연구는 이 재판이 복원된 헝가리 지도부가 주도하고 모스크바가 용인한 정치 재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 20만 명이 모인 가운데 너지의 재장례가 치러졌고, 헝가리 대법원은 그를 완전히 복권했다. 1956년은 냉전의 어느 쪽 신화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극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볼셰비키가 된 이 헝가리 농업학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고, 그의 처형은 사회주의 운동 자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결정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