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25–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57.06–1960.05
1960.05 해임
관련 역사 사건
카자흐스탄 제1서기 시절과 1959년 테미르타우 사태
벨랴예프는 1957년 12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되어 흐루쇼프가 추진한 처녀지 개간의 최전선을 맡았다. 당시 카자흐스탄에서는 콤소몰 파견증으로 모여든 젊은 노동자들이 테미르타우의 '카자흐스탄의 마그니토카'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으나, 식수와 식료품 공급이 반복적으로 끊기고 정상적인 주거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노동조건도 열악했다. 1959년 8월 1일 식당에서 소련인 노동자들에게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출신 건설 노동자들이 식사한 뒤로 기다리게 하면서 불만이 폭발했고, 노동자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구내식당과 상점을 부수며 3일 동안 시내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사병들은 비무장 시위자들을 향한 사격을 거부했으나 결국 군대와 사관생도들이 발포해 8월 3일 밤에서 4일 사이에 사태가 진압되었다.
공식 수치로 사망자 11명, 부상자 32명이 발생했고 그중 5명이 나중에 숨졌다. 약 190명이 체포되었으며, 42명이 형사 기소되어 그중 5명이 국가범죄 처벌법 제14조(강도죄)와 제16조(대규모 소요)로 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이후 받아들여져 정상적인 노동·주거 조건이 주어지고 불가리아 노동자들은 테미르타우를 떠났다.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파견되어 현지 당·경제 간부들을 질책하고 경찰관과 관료 다수를 제명·해임했으며, 10월 22일에는 카라간다 주 당 제1서기 파벨 이사예프가 해임되었다. 마침내 1960년 1월 19일 벨랴예프는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고 몇 달 뒤 강제 은퇴했다. 이후 그는 1966년 10월 28일 사망할 때까지 공직에 복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