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쇼르스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Щорс
소련 러시아 1895–1919 ✕ 전선에서 전사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로 지목한 전설의 붉은 군대 사단장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쇼르스의 죽음은 소비에트 남북전쟁사에서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19년 8월 30일 빌로시치 마을 근처에서 보훈 연대의 최전선을 시찰하던 중 적 기관총 사격에 머리를 맞고 전사했다. 부사단장 이반 두보보이는 회고록에서 "총알이 왼쪽 관자놀이로 들어가 뒤통수로 나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1949년 사마라에서 유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전문가들은 총상이 근거리에서 단총신 무기로 발사되어 후두부로 진입했다고 판정했다: 즉, 총알은 정면이 아니라 뒤에서 들어간 것이었다. 문서는 즉시 기밀로 분류되었다.

의혹의 초점은 현장에 함께 있었던 두 사람에게 모아졌다. 두보보이는 원래 제44사단장이었으나 사단 통합으로 쇼르스의 부하가 된 인물이었다. 쇼르스 사후 두보보이는 사단장직을 승계했다. 사단 내에서는 이미 1919년 8~9월부터 "두보보이가 자리를 차지하려고 쇼르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37년 체포된 보훈 연대장 카지미에시 크비아테크는 NKVD에 "내가 직접 목격한 쇼르스의 죽음 정황으로 볼 때 두보보이가 연루되었다고 굳게 믿는다"고 진술했다. 또 한 명의 용의자는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정치감찰관 파벨 탄힐-탄힐레비치였다. 그가 파견된 상관 세묜 아랄로프는 쇼르스를 "자신을 왕으로 여기는 반혁명분자"라고 트로츠키에게 보고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탄힐-탄힐레비치는 쇼르스 사망 두 달 만에 우크라이나를 떠나 남부전선으로 전속되었다.

두보보이는 1938년 파시스트 군사음모 혐의로 처형되었고(1956년 복권), 아랄로프는 소비에트 군사정보국(GRU)의 창설자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쇼르스의 사망은 적탄에 의한 전사인지, 정치적 암살인지, 아니면 단순한 유탄(도탄)인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해빙기" 이후 소비에트 역사가들 사이에서 재검토가 시작되었고, 독립 우크라이나의 사학계는 이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