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크 세묘노비치 셰닌

Олег Семёнович Шен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9 ○ 자연사

소련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간 마지막 정치국원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91.11 당 활동 금지까지 재임 · 1991년 8월 쿠데타 가담

관련 역사 사건

소련 해체 뒤의 재건 공산주의

셰닌의 정치적 의미는 1991년 8월의 실패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소련 해체를 불가피한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연방 차원의 공산주의 조직과 국가적 통합을 다시 세우려 한 정치인이었다. 1993년 재판이 진행 중이던 때 창립 의장으로 선출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공산당 연합(СКП-КПСС)은 해체된 소련의 공산당들을 하나의 조정 틀 안에 묶으려는 시도였다. 셰닌은 이 조직을 이끌며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연방적 연계를 유지하려 했고, 1997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만났다.

이 노선은 러시아 공산당의 선거정당화와 긴장 관계를 이루었다. 2000년 셰닌은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통합 공산당을 만들자는 구상을 둘러싸고 겐나디 주가노프와 결별했으며, 당 지도부가 사회주의의 이념적 기준에서 물러났다고 비판했다. 2001년에는 СКП-КПСС가 분열했고, 셰닌을 지지한 세력은 2004년 스스로를 КПСС로 재편했다. 이 조직은 소련 체제의 복원을 실제 국가 권력으로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셰닌이 후기 소비에트 정치의 조직 경험을 해체 이후의 공산주의 재건 프로젝트로 옮겨 간 경로를 보여준다.

8월 사태와 옥중·재판 시기

셰닌은 GKChP의 위원은 아니었지만, 8월 사태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정치국원이었다. 1991년 8월 17일 그는 쿠데타 직전 마지막 결정을 내린 회의에 참석했다. 노바야 가제타의 복원에 따르면 아카데미카 바르가 거리의 국가보안위원회 'АБЦ' 시설에는 국방장관 야조프, 내각 수반 파블로프, 중앙위 서기 바클라노프, 대통령 행정부 수반 볼딘, 국가보안위원회 부의장 그루시코, 그리고 아찰로프·바렌니코프 두 장군이 모였고, 참석자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도입을 강요하기 위해 포로스로 날아가기로 합의했다. 이튿날 바클라노프·볼딘·셰닌·바렌니코프 네 사람은 크림반도로 출발해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국가보안위원회 기관과 군부의 당 회의에서 셰닌은 '외부 시오니즘 센터'와 '소련의 시오니즘 센터'가 특정 정치세력을 지원한다고 말하며 보리스 옐친을 그와 연결시켰고, 비상사태 없이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바야 가제타는 부서기장 이바시코가 병중이던 때 그가 그 직무를 대행했으며,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조직 담당 서기가 원칙적인 이념적 반대자임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고 덧붙인다.

8월 19일 새벽 셰닌은 국가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위원장 레오니트 크라프첸코에게 GKChP 문서를 방송용으로 넘겼고, 같은 날 10시 50분에는 자기 서명으로 공화국 중앙위원회와 지역 당위원회에 암호전보를 보내 공산당원들을 동원해 GKChP를 지원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8월 22일 그에 대한 형사기소와 체포에 동의했고 다음 날 그는 체포되어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세 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1992년 10월 30일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면서 구속은 출국금지 서약으로 바뀌었다. 1994년 2월 사면되었고, BBC 러시아어 서비스는 수감 기간을 약 13개월로 본다. 영국과 러시아 기록이 함께 전하는 혐의는 8월 사태에서 비롯한 국가반역죄였다.

다만 러시아 공산당 측 기록은 체포 근거를 자기 서명으로 지역에 나간 GKChP 지원 암호전보로 설명하고 수감 기간도 '1년 이상'으로 적어 세부에서 갈린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트로스카야 티시나에서 야조프·크류치코프와 달리 고르바초프에게 참회의 편지를 쓰지 않았고 행한 일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1994년에는 사면을 거부한 발렌틴 바렌니코프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서로 다른 이 서술들은 하나의 연표로 합치기보다 각각의 출처에 귀속시켜 제시해야 한다.

재판정에서 셰닌은 혐의를 부인하는 대신 정치적 선언을 남겼다. 검사가 정말 음모에 가담했는지,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였는지 묻자, 그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순간부터 그 당원들과 음모를 꾸몄으며 유일한 목적은 노동인민을 섬기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사면 시점을 1994년 2월로 적으면서 그가 사면되었으나 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전하는데, 이는 위 선언과 겉으로 어긋나므로 그대로 보고할 사안이다. 한편 그는 1991년 12월 19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88조 제2항에 따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가담한 혐의로 궐석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여덟 명의 무리' 밖에서 법정이 주요 공모자로 지목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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