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경력 연표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1922년, 파울 레비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8년 브레슬라우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 비판적 평가』를 처음으로 출간했다. 룩셈부르크는 이 글에서 볼셰비키의 토지 정책, 민족 자결 문제, 제헌의회 해산,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는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라는 명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 민주주의의 운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원고는 룩셈부르크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고, 레비는 그녀의 문학적 유산 집행자로서 이 유고를 세상에 내놓았다.
출간의 정치적 맥락은 폭발적이었다. 레비가 1921년 3월 행동을 비판하며 KPD에서 축출된 직후였고, 코민테른은 독일 당에 '볼셰비키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원고는 볼셰비키 혁명의 권위주의적 경향에 대한 예언적 비판으로 읽혔고, 레닌은 즉각 반응하여 이후 '룩셈부르크주의'로 불리게 될 이단 목록을 작성했다. 레닌은 한 사적 서한에서 "폴 레비가 부르주아지의 환심을 사려 한다"며 원고 출간을 맹비난했고, 이로써 레비와 볼셰비키 지도부 사이의 결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출간은 단순한 역사적 문서 복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공산주의 내 룩셈부르크적 전통(대중적 민주주의, 반푸치즘, 자발성에 대한 신뢰)이 레닌주의적 당 모델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레비는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무기화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지켜온 맑스주의적 정직성의 연장선에서 이 유고를 출간했다. 이 결정으로 그는 소비에트 권력과의 관계를 희생했지만, 룩셈부르크 사상의 독자적 전승을 가능하게 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