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1865년 7월 14일(26일) 리가현 콕네세 볼로스트에서 태어나 1932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과 신문 『디에나스 라파』를 이끌었고, 1897년 체포되어 7개월 구금 후 뱟카현으로 5년 유형되었다.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했으며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1932 법률·사법 · 소련
경력 연표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관련 역사 사건
- 1917.10–1918.0110월 혁명법무인민위원 · 법원 포고 제1호의 공동 기초자10월 24일부터 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과 연락을 유지했고,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조사위원장을 맡았으며,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서 옛 사법 제도를 폐지하는 '법원 포고 제1호'를 공동 기초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으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 1918.11–1920.10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 수반1918년 12월부터 1919년 5월까지 소비에트 라트비아 정부의 수반으로 리가를 통치했고, 국유화와 혁명재판소 정책은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 1919–1921코민테른의 창설코민테른 라트비아 부문 책임자코민테른 제2차 대회 뒤 신설된 집행위원회 라트비아 부문 서기국 의장으로 선출됐다.
- 1922.12소련의 결성라트비아 소비에트 법이론가라트비아 혁명정부를 이끈 경험으로 소비에트 연방 법질서에 기여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법이론가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과 코민테른 시기의 라트비아 정책, 1918~1932
1918년 12월 17일 레닌의 정치·경제·군사적 지원 아래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스투치카가 정부를 이끌었다. 리가에서 열린 제1차 노동자·무토지 농민·소총병 소비에트 합동대회에서 라트비아 중앙집행위원회는 스투치카를 의장으로 하는 11인 인민위원회의를 임명했으며, 그는 사법인민위원을 겸했다. 정부 구성원 전원이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와 당 중앙위원회에 함께 앉아 권력은 좁은 집단에 집중되었고, 여덟 개 경제 인민위원부는 국민경제회의로, 군사·내무·사법은 혁명군사회의로 통합되었다. 부의장은 율리스 다니셰프스키스였다.
정부는 이스콜라트 시기의 급진 노선을 이어갔다. 부르주아 재산의 몰수는 처음에 인기가 있었으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대신 모든 농지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하고 무토지 농민에 의지하며 집단농장을 장려한 정책은 농촌의 지지를 무너뜨렸고, 도시 식량 공급의 실패와 심각한 부족을 낳았다. 이어 「반혁명 분자」를 찾는 적색 테러의 물결이 일었다. 혁명재판소와 인민법원이 세워졌고, 1919년 2월 13일 소비에트 라트비아 혁명군사회의는 강제수용소망의 설치를 결정했다. 대규모 정치 탄압을 위한 수용소를 공식 계획한 첫 사례로, 슈트크마니가 주요 시설이었고 1,600명 이상을 수용했다. 1919년 5월 반볼셰비키 군이 리가에 접근하자 처형이 격화되어 리가 중앙감옥에서 수감자 32명이 살해되었고, 다우가프필스에서는 1919년 3월 두브로빈 공원에서 유력 인사 76명이 처형되었다. 라트비아의 적색 테러 희생자는 약 1,500~2,000명으로 추산된다. 스투치카는 이 체제의 정치적 수반이었고, 테러의 주요 조직자는 다니셰프스키스였다. 스투치카 자신은 훗날 "1917년 11월부터 1922년까지 법은 형식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고 썼고, 빅토르 세르주는 그를 "지금은 잊힌 위대한 인물"로 부르며 당 위원회가 곧 정부였고 당원의 물질적 특권과 보드카가 금지된 엄격한 평등주의 체제를 세웠다고 전했다.
1919년 5월 22일 리가가 함락된 뒤 공화국 영토는 라트갈레 일부로 줄었고, 정부는 리가에서 레제크네, 벨리키예루키로 옮겨 가다 1920년 초 다우가프필스 패배 뒤 1920년 1월 13일 스스로 해산했다. 러시아로 돌아간 스투치카는 1920년 1월 17일부터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러시아국(1월 25일 국외국으로 개칭)에서 일하며 1월 31일 의장이 되었고,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뒤 신설된 집행위원회 라트비아 부문 서기국 의장에 1920년 10월 15일 선출되었다. 1924~1928년에는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그 사이 소비에트 러시아 사법인민위원 대리를 겸했다. 1928년 소련과 코민테른 지도부가 라트비아 공산당에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라고 지시하자 그는 라트갈레 분리주의를 되살리자고 주장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이즈사르기(국민방위대)에 가입하라고 조언하며 투쟁의 순간에 "우리 사람이나 우리에게 동의하는 사람"이 무기를 들어 지도자들을 죽여도 불행이 아니라고 했다.
법이론: 계급적 사회관계의 체계로서의 법
스투치카의 법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법학의 출발점이었다. 1924년 출간된 주저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에서 그는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질서)"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법을 단순한 규범의 집합이 아니라 계급사회의 실제 사회관계로부터 출발시킨 점에서 당대 법학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스투치카는 법의 세 가지 형식을 구분했다. 구체적 형식은 실제 사회관계로서의 법, 즉 생산관계와 계급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법이다. 추상적 형식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성문법·제정법으로서의 '법률'이고, 다른 하나는 법의식, 즉 사람들이 법을 인식하고 정당화하는 관념 체계다. 스투치카에 따르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법학은 구체적 법, 즉 계급적 사회관계 자체를 분석해야 하며, 법률과 법의식은 이 구체적 토대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예브게니 파슈카니스의 '상품교환형태론'과 생산적인 긴장을 형성했다. 파슈카니스가 법을 상품 교환 관계에서 발생하는 '법적 형식'으로 파악하고 사법(私法)을 법의 원형으로 본 반면, 스투치카는 법의 핵심을 계급적 생산관계에서 찾으며 공법과 사법을 아우르는 보다 포괄적인 틀을 제시했다. 스투치카는 파슈카니스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법을 상품교환으로 환원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법의 계급적 성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파슈카니스 또한 후기 저작에서 스투치카의 '법의 내용'으로서의 생산관계 개념을 수용하며 두 사람의 이론은 수렴했다. 1920년대 전반기 두 사람이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함께 이끌며 벌인 이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대표한다. '법을 토대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법을 생산관계로부터 이해하려 한 스투치카의 통찰은 소비에트 법학의 독자적 방법론을 확립한 기여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