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테탱제

Pierre Taittinger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7–1965 ○ 병사

청년애국단을 세운 의원, 거리의 부대와 의사당 의석을 함께 가진 사람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과 해방 후 구금

1940년 7월 10일 테탱제는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표결에 찬성했다. 그는 점령기에도 비시 정권을 지지하는 글을 신문에 싣고 페탱을 지지하는 강연을 했다. 1943년 5월부터 1944년 8월 파리 해방 때까지 파리 시의회 의장을 맡았는데, 시의회는 프랑스 당국과 독일 점령 당국이 유지한 비집행 기구였으며 경찰청의 권한 아래 있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독일 측의 요구를 막고 파리를 파괴에서 지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43년 9월 라발에게 파리를 개방도시로 선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그의 활동에 대한 서술은 자신의 사후 변론을 포함하므로, 그 주장은 점령 당국에 대한 지지와 함께 살펴야 한다. 1944년 파리 해방 때 체포된 그는 뱅센 자전거 경기장, 드랑시, 프레네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2월 27일 석방되었다. 1940년 전권 위임 표결 때문에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5년간 피선거권을 잃었다. 1953년 사면법 뒤 생조르주데코토 시장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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