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나 세묘노브나 젬추지나

Полина Семёновна Жемчужин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장관: 크렘린 권력과 유대인 정체성 사이에서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붉은군 정치장교에서 지하공작원으로, 그리고 젬추지나라는 이름 (1918-1922)

폴리나 젬추지나의 정치 경력은 1930년대 산업 간부직보다 훨씬 이른 1918년에 시작되었다. 1918년, 본명 페를 카르포프스카야였던 그녀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고 적군에 들어가 제12군 부대의 정치장교로 일하며 군인 클럽을 운영했다. 1919년에는 키예프로 지하공작 임무를 받았고, 이후 하리코프에서 폴리나 세묘노브나 젬추지나 명의의 신분 서류를 처음 발급받아 우크라이나 지하활동에 사용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이 서류가 하리코프에서 발급되었다고 서술하는 반면, 톰스크 NKVD 기념관의 인물 항목은 키예프 파견 당시 새 이름을 택했다고 기록해 발급 장소에는 차이가 있다. 어느 쪽이든 젬추지나는 지하활동용 가명이었으며, 어원적으로는 러시아어로 '진주'를 뜻하는 말이자 그녀의 이디시어 본명 페를과 같은 뜻이었다.

같은 해 그녀는 여성 활동에도 배치되어 1919-192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사업 담당 강사, 1920-1921년 자포리자 시당위원회 여성부 책임자를 맡았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는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이 키예프를 포함한 지역을 장악했던 때이며, 지하공작과 여성사업은 그 조건에서 이루어졌다. 지하활동 시절을 다룬 니콜라이 메클레르의 1932년 회고록은 그녀를 한 군 병원의 간호사로, 겉으로는 볼셰비키를 '증오하는' 인물로 그리며 그녀가 그런 위장 전설을 썼다고 전하는데, 이는 당시 출판된 선전적 회고의 서술로서 그녀의 실제 정치적 견해에 대한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1921-1922년에는 모스크바의 로고주스코-시모놉스키 지구당위원회 강사로 옮겨갔다. 1921년 그녀는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결혼했고, 두 사람의 만남은 1921년 여성 대회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의 공식 직함은 대부분 지구 및 지방 단위의 여성사업과 당 사업 직책이었고, 공장 경영과 인민위원회 직책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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