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군인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루츠크 돌파를 설계한 인물 중 하나였다. 1918년 5월 돈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을 받는 독자적 반볼셰비키 국가 돈 공화국을 세웠고, 돈의 자치를 고수하며 백군 통합 지휘를 두고 데니킨과 대립했다. 망명 후 대작 『쌍두 독수리에서 붉은 깃발로』 등 20권이 넘는 책을 낸 다작 소설가·회고록 작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치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맞설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고, 1945년 영국군에 인도되어 1947년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대돈군주: 독일의 비호 아래 세운 독립 돈 공화국

1918년 5월 16일 돈 카자크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모은 '돈 구원 회의'(Круг спасения Дона)는 크라스노프를 아타만으로 선출했고, 그는 소비에트 정권과 임시정부가 공포한 법령들을 폐지하고 '전대돈군주'(Всевеликое войско Донское)를 독립 국가로 선포했다. 8월에 열린 대군사회의는 그에게 사실상 독재자에 가까운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사회 기반 시설과 경제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외지 출신 농민에게도 토지를 나누어주며 징집함으로써 돈 군대를 1918년 중반 1만 7천 명 규모로 키웠다.

크라스노프의 가장 결정적인 정치 선택은 독일과의 제휴였다. 선출 직후 그는 빌헬름 2세에게 전보를 보내 돈이 국제법상 주체로서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무기 지원과 통상 관계를 제안했으며, 독일은 크라스노프 정부를 승인했다. 식량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소총 1만 1천 정, 대포 44문, 기관총 88정, 포탄 10만 발과 약 1천만 발의 총알이 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총 한 정의 값은 밀이나 호밀 1푸드였다.

이 독일 지향은 영국·프랑스(연합국)에 매달린 데니킨의 의용군과의 갈등을 불렀다. 카데트당과 망명 정치인들은 '동맹국이 온다'며 독일과의 거래를 비난했고, 크라스노프는 대군사회의에서 "돈의 아타만인 내가 더러운 손으로 독일의 포탄과 총알을 받아 조용한 돈 강 물에 씻어 깨끗하게 의용군에 넘겨주는 것, 이 모든 수치가 나에게 있다"고 맞받아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1918년 11월 독일의 패전과 빌헬름 2세의 퇴위로 돈 군대는 존립 기반을 잃었고, 그는 데니킨의 통솔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2월 15일 크라스노프는 압박 속에 아타만직에서 물러나 독일로 떠났다.

한편 1997년 12월 25일 러시아연방 대법원은 크라스노프가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복권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정해, 다른 백군 인사들과 달리 그의 사후 복권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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