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형법을 연구하고 나치 인종법도 정당화한 법학자
1937년 친볼셰비키 활동 혐의로 브레슬라우 동유럽연구소에서 밀려난 마우라흐는 2년 뒤 『러시아의 유대인 정책』을 내고 유대인이 러시아의 위험이라고 선전했다.
크림의 심페로폴에서 안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에스토니아 바이센슈타인의 군의(郡醫)였다. 내전 뒤 1920년 발트 지역을 거쳐 독일로 건너가 뷔르츠부르크와 브레슬라우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26년부터 브레슬라우 동유럽연구소에서 소련법을 맡으며 판사로도 일했다. 1934년 소련의 남성 동성애 처벌법을 비판해 불라토프와 논쟁했다. 1937년 친볼셰비키 활동 혐의로 연구소에서 밀려났으나, 1939년 『러시아의 유대인 정책』 등 반유대주의 저술과 나치 인종법을 정당화하는 글을 내며 19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전후 1948년부터 1970년까지 뮌헨 대학에서 형법과 동유럽법을 가르쳤다. 1976년 이탈리아 여행 중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0내전 뒤 발트 지역을 거쳐 독일로 이주
- 1925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소련 내 외국인의 법적 지위로 박사 학위
- 1926–1937브레슬라우 동유럽연구소 소련법 담당 연구원
- 1930브레슬라우 법원 판사
- 1934교수 자격 취득, 소련 동성애 처벌법 비판
- 1939『러시아의 유대인 정책』 출간
- 1940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원외교수, 동유럽법 연구소 설립
- 1945중상을 입고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다
- 1948–1970뮌헨 대학 형법·동유럽법 정교수
관련 역사 사건
1934년 소련 동성애 처벌법을 비판하다
마우라흐는 1934년 8월 소련의 새 처벌법이 기존 형사정책과 마르크스주의적 도덕의 원칙을 갑자기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1935년 세르게이 불라토프가 반박했다. 롤두기나는 이 논쟁을 재범죄화가 공개적으로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는 기존 서술을 보완하는 사료로 다룬다.
나치 시기 저술과 전후 학계
마우라흐는 1937년 친볼셰비키 활동 혐의로 조사받았지만, 이후 나치 인종법을 정당화하는 저술을 냈다. 1939년 『러시아의 유대인 정책』과 1940년의 저술은 반유대주의와 민족적 보호 논리를 전개했다. 소련 동성애 처벌법을 비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정치·법학 활동 전체를 자유주의적 권리 옹호로 규정할 수는 없다. 전후에는 뮌헨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형법 교과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