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병리학을 세우고 독일 진보당에서 비스마르크에 맞선 병리학자
포메른 시펠바인 출신의 의사·병리학자·인류학자. 1848년 오버슐레지엔 티푸스 유행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질병의 뿌리를 빈곤과 정치에서 찾았고, 그해 베를린 3월 혁명에 가담했다가 이듬해 샤리테 병원에서 쫓겨났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을 거쳐 1856년 베를린 대학 병리해부학 교수로 돌아왔고,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라는 원칙에 선 『세포병리학』(1858)으로 현대 병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1861년 독일 진보당을 함께 세웠고, 1862년부터 프로이센 하원, 1880~1893년 제국의회 의원으로 비스마르크의 군비 예산에 맞섰다. 1873년 가톨릭 교회와의 싸움을 「문화투쟁」이라 이름 붙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43.10베를린 대학에서 의학 박사
- 1846.05샤리테 병원 해부 담당의
- 1848오버슐레지엔 티푸스 유행 조사
- 1849–1856뷔르츠부르크 대학 병리해부학 교수
- 1856–1902.09.05베를린 대학 병리해부학 교수
- 1858『세포병리학』 간행
- 1861독일 진보당 공동 창당
- 1862프로이센 하원 의원
- 1880–1893제국의회 의원
사회 의학과 세포병리학
1847~1848년 프로이센 정부의 의뢰로 오버슐레지엔의 티푸스 유행을 조사한 피르호는 병을 약으로 다스릴 수 없고 빈곤과 무권리를 없애야 한다고 보고했다. “의학은 사회 과학이고 정치는 큰 규모의 의학일 뿐”이라는 그의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는 1848년 3월 베를린 혁명에 가담하고 주간지 《의학 개혁》을 냈다가 이듬해 샤리테에서 해직되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일곱 해를 보낸 뒤 1856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독일 최초의 병리학 연구소를 맡았다. 모든 세포는 다른 세포에서 생긴다는 원칙(「모든 세포는 세포에서」)을 내세워, 병을 체액의 불균형으로 설명하던 옛 학설을 몰아내고 세포를 병의 단위로 삼았다. 다만 제멜바이스의 산욕열 연구나 코흐의 세균학, 헤켈의 진화론에는 끝까지 회의적이었다.
진보당과 비스마르크
1861년 피르호는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 진보당을 함께 세웠고, 이듬해 프로이센 하원에 들어갔다. 진보당은 1866년까지 하원 다수당이었다. 헌법 분쟁기에 비스마르크의 군비 예산에 맞서다가 1865년 비스마르크에게서 결투 신청을 받았으나 결투는 야만적이라며 거절했다. 1869년에는 북독일 연방의 군비 축소와 국제 중재 재판, 유럽 합중국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냈다.
그러나 1873년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지지하며 이를 「문화투쟁」이라 불렀고, 이 말이 그 싸움의 이름이 되었다. 1880~1893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고 1884년부터는 독일 자유사상당 의원단에 속했다. 반유대주의와 식민 정책에 반대했고 프로이센의 폴란드인 같은 소수 민족의 권리를 옹호했다.
울리히스와의 편지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는 『인클루사』를 읽은 피르호가 1864년 8월 19일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멤논』(1868) §45의 권위 있는 증언 가운데 하나로 실었다. 피르호는 “남성의 몸 안의 여성의 마음”이라는 설명에 반대할 것이 없고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썼다. 그러나 바로 다음 §46에서 울리히스는 피르호가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막는 최선의 수단으로 형벌을 내세운다고 비판하며 이를 “어머니 젖과 함께 빨아들인 박해욕”의 예로 들었고, 책 끝머리에서는 “모든 슈바르체, 피르호, 미고에도 불구하고” 싸우자고 외쳤다. 피르호는 이듬해인 1869년 남성 사이의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지 말자는 쪽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