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를 제거한 스탈린의 첩보 거장, 결국 스탈린의 감옥에서 15년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경력 연표
- 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관련 역사 사건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의 초콜릿 상자
파벨 수도플라토프는 멜리토폴 태생으로 소년 시절 내전의 한복판에서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십 대에 이미 체카 계통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그는 밀사로 위장해 국외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조직(OUN)에 침투했다. OUN의 지도자 예브겐 코노발레츠는 독일 정보기관과 손잡고 소련을 겨냥한 공작을 준비하던 인물이었다.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의 한 카페에서 수도플라토프는 코노발레츠에게 폭탄이 장치된 초콜릿 상자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몇 분 뒤 폭발로 코노발레츠는 즉사했고, 수도플라토프는 유럽을 가로질러 무사히 귀환했다.
1939년 스탈린은 그를 직접 불러 트로츠키를 겨냥한 작전, 암호명 「우트카(오리)」의 책임을 맡겼다. 수도플라토프는 에이팅곤과 함께 멕시코 공작망을 구축했고, 1940년 8월 라몬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살해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NKVD 특수임무국(후일 제4국)의 수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전과 파괴 공작, 그리고 아프베어를 상대로 한 「모나스티리」, 「베레지노」 같은 무전 기만전을 총괄했다.
전쟁 말기부터는 S국을 이끌며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해외 정보망이 보내온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정리해 쿠르차토프의 개발 계획에 연결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았다. 특수작전과 정보전이라는 소비에트 정보기관의 가장 은밀한 영역을 20년 가까이 관통한 경력이었고, 그 경력의 무게가 훗날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1953년 8월, 블라디미르 감옥으로 가는 길
1953년 6월 베리야가 실각하자 그의 계통에서 일했던 간부들에 대한 숙청이 뒤따랐다. 수도플라토프는 그해 8월 자신의 집무실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수사가 길어지자 정신 이상을 가장해 수 년을 감옥 정신병원에서 버텼다. 1958년 결국 15년형이 선고되었고, 그는 1968년 8월까지 블라디미르 중앙감옥에서 복역했다. 옥중에서 뇌졸중을 겪어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채 출소한 그는 이후 사반세기 동안 복권을 위해 싸웠고, 1992년 1월에야 복권되었다.
1994년 미국에서 출판된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비에트 정보사의 내부를 담은 일급 증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격렬한 사료 논쟁을 불러왔다. 특히 오펜하이머, 페르미, 보어 같은 서방 과학자들이 소련 정보기관에 의식적으로 협력했다는 주장은 데이비드 홀로웨이를 비롯한 핵개발사 연구자들과 물리학계의 검증에서 문서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오늘날의 연구는 이 회고록을 문서고 자료와 대조해 선별적으로만 사용한다.
수도플라토프는 199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소비에트 국가가 가장 위험한 시기에 운용한 특수작전의 실체와, 그 도구였던 사람들이 정치의 풍향이 바뀔 때 치른 대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코노발레츠와 트로츠키 작전의 집행자였고 파르티잔전과 원자 정보전의 조정자였던 그는, 인생의 마지막 40년을 자신이 봉사했던 국가를 상대로 한 명예 회복 투쟁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