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8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골로쇼킨의 무분별한 집단화가 카자흐 인민에게 기근과 끔찍한 재앙을 가져왔다고 항의했다.
우랄주의 카자흐인 가정에서 태어나 지방 서기와 체카 요원을 거쳐 1920년 입당했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수도의 알마아타 이전과 공업화를 지휘했다. 1932년 8월 골로쇼킨의 집단화가 기근을 불렀다고 스탈린에게 항의해 정책 전환을 끌어냈지만, 곡물 징수 방해 농민의 대량 체포에 서명했고 1937년에는 특별 3인위원회의 일원으로 탄압에 가담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8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오라즈 이사예프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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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8
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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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8
소련 국가기관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 의장대표
정부·행정
경력 연표
- 1920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1922체카 전권위원
- 1924–1925카자흐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 1928–1929카자흐 지역위원회 제2서기
- 1929–1938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 의장
- 1938.05.31–08.29체포, 군사참의회 판결로 총살
체카 요원에서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이사예프는 1899년 5월 28일 우랄주 르비셴스크군 카라수 읍 제4아울의 카자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2년제 러시아-카자흐 초등학교를 마쳤고, 1918년까지 우랄주 셸카르 젬스트보 관청의 서기로 일했다. 1919년 우랄 군·시 노농 민경과 르비셴스크군 혁명위원회 교관을 거쳐 아울 소비에트 서기, 셸카르 읍 집행위원회 부의장을 지냈고 르비셴스크 읍 콤소몰 위원회를 조직했다. 1920년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들어갔고(카자흐어 자료는 1921년), 1921~1922년에는 잠베이티 체카 정치국 전권위원과 우랄 현 체카 작전 전권위원으로 일했다.
1924~1925년 그는 카자흐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였고, 지역 통제위원회 부의장 겸 노농감독 부인민위원을 두 차례 지냈다. 이후 카자흐 지역위원회 조직부장과 서기국 위원을 거쳐 1928~1929년 제2서기가 되었다(카자흐어 자료는 제2서기 재임을 1925~1929년으로 적는다). 카자흐어 자료에 따르면 1926년 7~8월에는 카자흐어 신문 『엥베크시 카자크』의 편집장도 맡았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그는 카자흐 자치공화국, 이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민위원회 의장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공화국 수도가 크질오르다에서 알마아타로 옮겨졌다.
1932년 8월 그는 스탈린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내, 골로쇼킨이 이끈 무분별한 집단화가 카자흐 인민에게 기근과 끔찍한 재앙을 가져왔다고 항의했다. 러시아 연방 인민위원회 부의장 투라르 리스쿨로프의 편지와 함께 이 호소는 카자흐인에 대한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1932년 9월 17일 스탈린은 「카자흐스탄의 목축 발전에 관하여」라는 중앙위원회 결정에 서명했다. 그는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 카자흐스탄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고, 1930(1934)~1937년 중앙위원 후보였다가 1937년 10월 12일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으로 올랐다. 1935년 12월 20일 농업 계획 초과 달성으로 카자흐인 가운데 처음으로 레닌 훈장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936년 2월 5일 그가 서명한 인민위원회 결정으로 카자크 자치공화국의 러시아어 이름과 민족 명칭이 казак에서 казах로 바뀌었다. 1925년부터 러시아어에서 카자흐인은 러시아의 카자크 신분 집단과 같은 낱말로 적혀 왔는데, 결정은 이를 “카자흐어 낱말 ‘қазақ’의 발음에 맞추어” 고친다고 밝혔다.
그의 재임 중 엠바네프트 기업과 카라간다 탄전, 발하시·카르팍사이·제즈카즈간·레니노고르스크·지랴놉스크의 제련소가 세워져 카자흐스탄 공업화의 기틀이 놓였고, 문맹 퇴치와 초·중등학교 개설이 이루어졌다. 그는 문화인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1930년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알라시오르다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희곡 상연을 금지당한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를 상부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도왔고, 글을 모르는 아큰 잠빌 자바예프에게 급여를 받는 문학 비서 다섯 명을 붙여 주었으며, 독학한 화가 아빌한 카스테예프를 공화국 비용으로 모스크바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1936년 모스크바에서 그의 지휘로 처음 열린 카자흐스탄 문학·예술 순간(旬間)에서는 쿨랴시 바이세이토바가 오페라 「크즈지베크」로 갈채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명령 제00447호(1937년 7월 30일)로 만든 특별 3인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스탈린 시기의 탄압에 적극 가담했다. 1932년 11월 11일에는 골로쇼킨과 함께 곡물 징수를 방해한다고 고발된 농민들의 대량 체포와 추방을 명령하기도 했다.
스탈린 총살 명단
1938년 5월 그는 모스크바로 불려 갔고, 5월 31일 국가보안총국에 체포되었다. 1938년 8월 20일자 스탈린 총살 명단(제1호)에 제1범주로 올랐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찬성 서명을 했다. 8월 29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참의회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했고, 그는 같은 날 스타니슬라프 코시오르 등 명단에 오른 다른 피고인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유해는 내무인민위원부 특별 시설 ‘코무나르카’에 묻혔다. 1956년 5월 19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참의회가 그를 복권했다.
아내 사라 예소바(1903~1984)는 1929~1932년 교육 노동자 조합 중앙 이사회 의장을 지냈고, 남편이 복권된 뒤 카자흐스탄 중앙 국립 박물관장이 되었다. 알마티와 우랄스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