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글루시코와 코롤료프 — 추진제 논쟁과 소련 달 경쟁의 운명

소련 우주 개발 역사에서 글루시코와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결별만큼 결정적인 균열은 드물다. 원래 두 사람은 동지였다. 1930년대 RNII에서 코롤료프의 날개로켓 212와 로켓비행기 RP-318에 글루시코의 ORM-65 엔진이 올라갔고, 1940년대 카잔 샤라시카에서는 글루시코의 KB-2 아래 코롤료프가 실험 그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60년을 전후해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갈라섰다.

갈등의 핵심은 추진제 선택이었다. 글루시코는 상온 저장이 가능하고 즉시 점화되는 사산화질소-UDMH 계열(하이퍼골릭)을 소련 중량급 로켓의 표준으로 밀었다. 코롤료프는 1960년 네델린 참사를 직접 목격한 뒤 고독성 하이퍼골릭 추진제에 강하게 반대하며 액체산소-케로신(극저온)과 액체수소를 고집했다.

이 대립은 N-1 달로켓에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코롤료프의 OKB-1이 N-1의 1단과 2단 엔진을 의뢰하자 글루시코는 액체산소-케로신 대형 단일연소실 엔진은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대신 하이퍼골릭 RD-270을 제안했고, 코롤료프는 거절했다. 결국 N-1의 엔진은 항공기 엔진 전문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의 OKB-276으로 넘어갔고, 30개의 중소형 엔진을 묶는 설계가 채택되었다. 이 복잡한 배치는 신뢰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N-1은 네 차례 시험발사에서 모두 실패했다.

이 파국의 배경에는 개인적 상처도 있었다. 1938년 대숙청 때 글루시코는 NKVD 심문에서 코롤료프를 밀고했고, 코롤료프는 콜리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아사 직전까지 갔다. 두 사람은 이후 직업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1960년대 중반까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 대부분 사료의 평가다. 코롤료프 사후(1966년) 글루시코는 N-1의 엔진을 '썩은 엔진'이라고 불렀고, 1974년 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로 취임하자마자 N-1 계획 전체를 폐기했다.

글루시코는 대안으로 RD-170 엔진을 제시했다. 단일 터보펌프가 네 개의 연소실을 공급하는 이 설계로 그는 코롤료프가 요구했던 액체산소-케로신 대추력 문제를 우회적으로 해결했다. RD-170은 1987년 에네르기야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비행했고,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액체로켓엔진으로 남아 있다. 글루시코는 자신이 끝까지 반대했던 액체수소를 에네르기야 코어단에 채택함으로써 기술적 유연성도 보여주었으나, 그가 20년간 하이퍼골릭을 고수한 대가는 소련이 달 경쟁에서 패배하는 동안 미국이 F-1과 새턴 V를 완성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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