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95–1977 ○ 자연사

천왕성 작전을 설계한 신학교 출신 참모

스탈린이 가족을 묻자, 사제인 아버지가 인민의 적으로 몰릴까 두려워 1924년부터 연락을 끊었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은 놀라며 "당장 관계를 회복하고 부모님을 도우시오"라고 말했다.

신학교 출신으로 소련 참모총장이 된 군인. 주코프와 함께 스탈린그라드 반격작전 우라누스를 설계하고 전쟁 후반 주요 공세 기획을 총괄했다. 스탈린에게 이견을 말하고도 살아남은 보기 드문 인물이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2년 11월, 우라누스 작전의 설계자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볼가 상류 노바야 골치하의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차대전이 터지자 장교 속성 과정을 거쳐 참모대위까지 올랐다. 붉은 군대에 들어온 뒤 그는 야전 지휘보다 참모 업무에서 재능을 드러냈고, 참모총장 샤포시니코프의 눈에 들어 참모본부 작전부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사제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냈으나, 뒷날 스탈린이 직접 아버지와 다시 왕래하라고 권해 부자가 화해한 일화는 그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1942년 6월 참모총장이 된 바실렙스키는 그해 가을 주코프와 함께 스탈린그라드 반격 구상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도시 안의 소모전으로 독일 6군을 붙잡아 두는 동안, 전선 양익의 취약한 루마니아군 구간을 돌파해 거대한 포위망을 닫는다는 계획, 우라누스 작전이었다. 두 달에 걸쳐 병력과 물자가 은밀하게 집결됐고, 바실렙스키는 스타프카 대표로 현지에서 준비를 조율했다.

1942년 11월 19일 반격이 시작됐고 나흘 만에 포위망이 칼라치에서 닫혀 독일 6군 33만 명이 갇혔다. 바실렙스키는 이후에도 스타프카 대표로 쿠르스크, 크림, 벨라루스의 주요 작전을 전선에서 조율했다. 참모본부의 책상과 전선 지휘소를 오간 그는 소련군 승리의 계획자 중 가장 조용한 사람으로 불렸다.

1945년 8월 9일, 만주 전략 공세

1945년 2월, 3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체르냐홉스키가 전사하자 바실렙스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4월 쾨니히스베르크 요새를 함락시켰다. 독일 항복 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얄타 합의에 따라 소련이 약속한 대일본전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유럽에서 극동으로 병력을 옮기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전략적 재배치를 지휘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하나에 의지해 석 달 만에 수십만 병력과 장비가 9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1945년 8월 9일 자정, 세 개 전선군 150만 병력이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자바이칼전선군의 전차부대는 통행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대흥안령 산맥과 고비 사막 연변을 넘어 관동군의 배후 깊숙이 진격했다. 소련군이 전쟁 내내 발전시킨 종심 작전 이론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구현된 작전이었고, 관동군은 열흘 남짓 만에 조직적 저항 능력을 상실했다.

만주 작전은 일본의 항복 결정을 앞당긴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되며, 미국 전략가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기동전의 교본이 됐다. 바실렙스키는 이 작전으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전후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뒤 1977년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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