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공업부를 가스프롬으로 바꾼 소련 마지막 가스공업 장관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경력 연표
- 1960–1973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운전기사,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 부주임기사·공장장
- 1973–1982오르스크 시당·CPSU 중앙위 중공업부에서 산업 행정
- 1982–1985소련 가스공업 차관, 튜멘가스프롬 청장
- 1985–1989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9–1992국영 가스 콘체른 가스프롬 창설·초대 이사회 의장
- 1984–1990소련 최고회의·RSFSR 최고회의 대의원, CPSU 중앙위원
관련 역사 사건
가스 인간, 부처를 회사로 바꾼 남자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은 1938년 오렌부르크주의 코사크 마을에서 태어나 오르스크 정유공장의 기계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야간 대학으로 학위를 따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의 지휘부로 올라갔고,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이 되었다. 석유 증산이 정체된 1980년대에 가스는 소련 경제의 마지막 성장 동력이었고, 그는 그 산업의 정점에 선 현장형 관리자였다.
1989년 그는 소련 관료제에서 전례 없는 일을 해냈다.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그 자산 전체를 국영 콘체른 「가스프롬」으로 전환한 것이다. 명분은 경영 효율이었지만 결과는 더 깊었다. 계획경제의 부처가 통째로 기업이 되어, 훗날 세계 최대의 가스 회사이자 러시아 국가 자본주의의 원형이 될 조직이 탄생했다.
소련이 해체될 때 부처들은 사라졌지만 가스프롬은 살아남았다. 제도의 폐허에서 자산을 형태만 바꿔 존속시킨 이 수완이야말로, 훗날 그가 이행기 러시아의 총리로 여섯 해를 버틴 비결의 예고편이었다.
이행기의 총리 6년, 「더 잘하려 했는데 늘 그렇게 됐다」
1992년 12월 인민대표대회가 가이다르를 거부하자, 옐친은 개혁파와 산업 관료 양쪽이 견딜 수 있는 인물로 체르노미르딘을 총리에 세웠다. 그는 이후 5년 넘게, 격동의 1990년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 버틴 총리가 되었다. 급진 개혁의 속도를 늦추되 되돌리지는 않는 것, 그것이 그의 통치술이었다.
1993년 화폐 교환 소동을 해명하던 기자회견에서 나온 「우리는 더 잘하려 했는데, 늘 그랬듯이 되어 버렸다」라는 말은 러시아어의 속담이 되었다. 1995년 부됸놉스크 병원 인질극 때는 전화기를 들고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체첸 지휘관과 직접 협상해 인질 수백 명을 구했다. 「샤밀 바사예프, 더 크게 말하시오」라는 그의 고함은 시대의 소리 풍경이 되었다.
1998년 3월 옐친은 예고 없이 그를 해임했고, 8월 국가부도 뒤 재기용하려 했으나 의회가 두 차례 거부했다. 이후 그는 유고슬라비아 특사로 코소보 전쟁의 종전 중재에 한몫했고, 2001년부터 8년간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냈다. 2010년 그가 죽자, 그의 어록집이 곧 그의 전기라는 말이 나돌았다.
체르노미르딘키, 말실수가 남긴 진실들
체르노미르딘은 러시아 정치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화자 가운데 하나다. 다만 그 인용은 연설문이 아니라 말실수에서 나왔다. 문법이 무너지고 논리가 엉키는데 뜻은 이상하게 정확한 그의 어록은 「체르노미르딘키」라는 이름의 민속 장르가 되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또 일어났다」, 「어떤 정당을 만들어도 결국 소련공산당이 된다」 같은 문장들은 이행기 러시아의 부조리를 어떤 정치학 논문보다 잘 요약했다.
지식인들은 그의 어눌함을 조롱했지만, 대중은 거기서 자신들의 언어를 들었다. 연단의 세련된 거짓말이 넘치던 시대에, 더듬거리며 튀어나오는 그의 본심은 오히려 신뢰의 표지가 되었다.
역사가들의 평가에서 그는 가이다르의 이론도 프리마코프의 전략도 없이, 오직 현장의 감각으로 파국 사이를 항해한 관리자로 남는다. 그가 만든 가스프롬과 그가 남긴 문장들은, 계획경제의 살림꾼이 시장의 폐허를 어떻게 건너갔는지를 보여 주는 두 개의 기념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