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08–1913 정부·행정 · 러시아 제국
- 1913–1915 보안·정보·치안 · 러시아 제국
경력 연표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관련 역사 사건
혁명 이후의 투옥과 소비에트 치안기관 협력
1918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준콥스키는 1921년까지 투옥 생활을 했다. 리처드 로빈스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처형을 면했고, 석방에는 혁명가들을 공정하게 대했다는 평판과 대중의 탄원이 작용했다. 이는 초기 체포·수감과 석방의 경위를 전하는 후대의 전기 서술이다. 1920년대에는 소비에트 치안기관을 위해 자문했으며, 지방 치안과 관련된 업무에도 참여했다. 크로노스의 전기는 그가 특히 여권 제도에 관한 규정을 마련했다고 기록한다. 다만 그가 오게페우의 「트레스트」 작전에 직접 관여했다는 주장은 확정된 사실처럼 단정하기 어렵다. 로빈스는 이 작전에서의 가능한 역할을 논의하면서 문서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트레스트」는 해외 망명 반볼셰비키 집단을 겨냥한 소비에트 정보기관의 침투·기만 작전이었으므로, 그와의 연관은 확인 가능한 구체적 활동으로 한정해 서술해야 한다.
회고록 집필과 대테러 시기의 처형
1921년 11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으로 풀려난 준콥스키는 이듬해 모스크바의 누이 예브도키야 집에 거주 등록을 했다. 그는 한동안 교회 관리인으로 일하고 프랑스어 개인 교습을 하면서 1865년부터 1917년까지를 다룬 회고록을 썼다. 1934년 블라디미르 본치브루예비치가 이 원고를 사들였다. 회고록은 그가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나왔다.
1937년 12월 3일, 72세의 연금 생활자였던 준콥스키는 다시 체포되었다. 1938년 2월 21일 모스크바주 내무인민위원부(NKVD) 관리국의 트로이카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트로이카는 1937년 8월 시작된 대량 작전에서 피고인을 출석시키지 않고 변론 절차 없이 판결하던 기구였고, 판결에는 항소할 수 없었다. 부토보 기념 연구 센터의 희생자 데이터베이스는 그가 2월 26일 모스크바 교외의 부토보 사격장에서 총살되었다고 기록한다.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의 전기 등 다른 자료는 판결 당일 총살되었다고 적는다.
1989년 1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결정으로 그는 사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