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유전적 계획 방법론과 스탈린의 공격

1920년대 소련 경제계획 논쟁은 '유전적(genetic)' 방법과 '목적론적(teleological)' 방법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그로만과 바자로프가 주창한 유전적 방법은 과거 추세에서 경험적 법칙성을 추출해 미래를 전망하는 접근이었다. 그로만은 네프기 소련 경제가 1차대전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회복적 성장' 단계에 있다고 보았고, 회복이 완료될수록 성장률이 둔화된다는 '지수적 감쇠곡선'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스트루밀린 등이 주창한 목적론적 방법은 사회주의 의지가 설정한 목표에서 출발해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만은 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으로서 1925/26년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를 작성하고 산업·농업·재정·무역을 하나의 표로 연결하는 균형법을 설계했다. 이는 소련 계획경제의 기술적 토대였으나, 그로만 자신은 통제숫자를 '계획'이 아닌 '경기 예측'으로 생각했고 시장 신호의 자율성을 계획의 전제로 삼았다. 이러한 입장은 1928년 스탈린이 급속한 공업화로 전환하면서 정치적 위험으로 변했다.

결정적 타격은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에서 가해졌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그로만의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테제를 직접 거론하며 "이것은 그로만이었다"고 지목했다. 이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그로만은 고스플란 내 반혁명 조직의 수장으로 기소되어 '파괴적 경제 전망'을 통해 계획을 왜곡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유전적 계획 방법론 자체가 반혁명으로 낙인찍혔고, 소련 계획경제학은 이후 수십 년간 목적론적 방법이 독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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