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밀류틴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Милютин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 기초를 놓은 첫 농업인민위원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 통계와 계획경제의 설계자

밀류틴은 소비에트 통계 체계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그의 학문적·실무적 작업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폐지한 후 어떻게 경제 전체를 수량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할 것인가라는 근본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8년 중앙통계국(TSuU) 국장에 임명된 그는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이 동시에 추진되던 격변기에 소련의 통계 인프라를 지휘했다. 이 시기 그의 과제는 단순한 수치 수집이 아니었다. 방대한 농촌의 생산량·가축 수·파종 면적을 실시간에 가깝게 집계해 고스플란의 계획 수치와 대조하고, 집단화로 인한 통계 왜곡을 교정하며, 당 지도부에 실행 가능한 경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의 경제사상에는 뚜렷한 전환이 있었다. 내전기에는 노동자 통제와 국유화를 새로운 생산양식의 핵심으로 보았고, 1920년대 초에는 국가의 과도한 계획 개입에 회의적이었다. 레닌은 1921년 2월 『프라우다』 기사에서 밀류틴의 계획경제 비판을 "허튼소리"라 공개 비판했고, 1922년 가을 밀류틴이 대외무역 독점 폐지를 주장하자 다시 충돌했다. 그러나 1928년 이후 그는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 노선에 적응해 5개년 계획의 열성적 옹호자가 되었고, 통계를 계획의 도구로 재정의했다. 『소비에트 경제정책의 기초』(1926)와 『소련 경제발전의 역사』(1928)를 포함한 다수의 저작은 초기 소비에트 계획 이론의 기초 문헌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초 그는 공산주의아카데미 간부로서 철학자 아브람 데보린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기도 했다. 밀류틴의 통계 작업은 단명했다. 1930년 말 TSuU 국장에서 해임된 후에도 고스플란 부의장과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으로 남았으나, 1937년 체포와 함께 그의 모든 경제·통계적 유산은 공식 기억에서 지워졌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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