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3–1967 외교·국제활동 · 유고슬라비아
경력 연표
-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관련 역사 사건
1942~1943년 독일군과의 포로 교환 및 협상
벨레비트는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일원으로 독일군과의 포로 교환 및 접촉을 맡았다. 1942년 11월 17일 그는 마리얀 스틸리노비치와 함께 독일 측 한스 오트와 협상해 두 번째 포로 교환을 성사시켰다. 파르티잔은 이때 자신들을 군기를 갖춘 독립 무장세력으로 규정하고, 포로와 부상자에 관한 국제법 적용 및 정기 교환을 제안했다. 1943년 3월 추축군의 바이스 작전 공세 중 최고사령부는 네레트바강을 건널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과 포로 교환 협상을 시작했다. 3월 11일 고르니 바쿠프에서 시작된 협상에 벨레비트는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으로 밀로반 질라스, 코차 포포비치와 참여했다. 파르티잔 대표단은 포로 교환과 교전 중단을 제안하고 체트니크를 주된 적으로 지목했다. 이후 벨레비트와 질라스는 독일군 통과를 거쳐 자그레브로 가서 협상을 이어갔으며, 파르티잔의 제안은 항복이 아니라 교전국 지위 인정과 상호 적대 중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벨레비트는 별도로 슬라보니아와 보스니아 동부의 파르티잔 지휘관들에게 독일군과 철도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포로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그는 자그레브에 남아 구금된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헤르타 하스의 석방도 주선했다. 독일 지도부가 3월 말 추가 접촉을 금지했고, 약 6주간 이어진 비공식 휴전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끝났다. 협상은 당장의 네레트바강 도하와 전력 보전에 기여했지만, 5월 중순 슈바르츠 작전 공세로 그 단기적 이점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