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경제학 사이에서 방향을 바꾼 사회민주주의자
북부전선에서 병사들이 더는 공세를 원하지 않는 현실을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위원회 활동, 실업자 소비에트 조직
- 1908–1912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체포, 강제노동형과 시베리아 유형
- 1914–1916시베리아 짐머발트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활동
- 1917.04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기관지 편집진
- 1917.06–10북부전선 위원, 6월 공세 준비와 전선 정치 업무 담당
- 1918–1935그루지야 민주공화국 대표·유럽 사회주의 언론인, 국제노동기구 활동
- 1935–1960미국 인구조사국·사회보장위원회 등에서 경제·노동 연구
- 1960워싱턴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대공황기 공공고용 구상과 WTB 계획
1931년 독일에서 대량실업과 디플레이션이 심해지자 독일노동조합총연맹(ADGB)의 통계부에서 일하던 보이트인스키는 공공사업으로 고용을 늘리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1931년 6월 발표한 「경제 부흥 행동계획」에서 노동운동이 국가와 공공기관에 경기회복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금 보유 요건을 낮추는 국제협정을 통해 중앙은행이 새 신용을 공급하고 여러 나라가 함께 공공사업을 벌이는 구상을 내놓았다. 국제적 협력은 한 나라만 신용을 확대할 때 생길 물가상승과 재정 위험을 줄이는 방안으로 제시됐다. 도로·운하·전력망과 주택·토지개량 사업을 통해 실업자를 고용하고 구매력을 회복한다는 계획이었다.
같은 해 보이트인스키, 목공노조 지도자 프리츠 타르노프, 사회민주당 의원 프리츠 바데는 이른바 WTB 계획을 마련했다. 이 국내 고용계획은 중앙은행의 20억 라이히스마르크 대출로 약 100만 개 일자리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ADGB는 공식 채택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계획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노동조합 지도부의 논의에 부쳤다. 루돌프 힐퍼딩과 오토 벨스는 물가상승 우려 등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당은 이후 공공고용을 위한 조세 재원 계획을 지지했지만, WTB의 신용재원 방식은 채택되지 않았다. 보이트인스키의 제안은 대공황에 맞서 노동조합이 실업 대책과 국가의 경제 개입을 둘러싼 정책 논쟁에 참여한 구체적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