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쑨원과 만나고 좌우합작을 택한, 분단 직전 조선의 마지막 통일주의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경력 연표
- 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 1925–1929쑨원 권유로 중국국민당 입당, 국공합작 참여
- 1933–1936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4비밀결사 건국동맹 결성, 전국 조직화
- 1945.8–9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 1946–1947좌우합작운동 전개, 근로인민당 위원장
좌우합작운동과 통일사회민주주의
1946년 7월, 여운형은 김규식·안재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측 대표로 참여했다. 이는 신탁통치 찬반을 둘러싸고 극단으로 치닫던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을 극복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통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중도파의 시도였다. 1946년 10월 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토지의 무상 분배, 주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청산, 정치적 자유 보장 등이 담겼다. 이 원칙은 좌익과 우익이 각각 한 걸음씩 양보한 결과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토지 무상 분배에, 조선공산당은 유상 몰수에 각각 반대했고, 미군정 또한 냉전이 심화되자 1947년 3월 지원을 철회했다. 여운형은 천도교의 평등사상과 기독교 인도주의에 뿌리를 둔 '통일사회민주주의'라는 독자적 정치철학을 견지하며 좌우합작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으나, 1947년 7월 극우단체 백의사의 암살로 운동은 결정적 지도자를 잃고 12월 공식 해체되었다. 이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이후 김규식의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