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상공에서 비행기를 돌린 아랍주의자 총리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경력 연표
- 1953–62국영방송 아랍어 편집국, IMEMO 연구원
- 1962–70《프라우다》 중동 특파원, 카이로 주재
- 1970–77IMEMO 부소장, 비밀 중동 외교 임무
- 1977–85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소장
- 1985–89IMEMO 소장, 소련과학원 아카데미크
- 1989–90정치국 후보위원, 소비에트연방회의 의장
- 1991KGB 제1총국장 → 중앙정보국장 → SVR 국장
- 1996–98러시아 외무장관, 다극체제 독트린
- 1998–99러시아 총리, 대서양 반전 귀국
관련 역사 사건
트빌리시의 소년, 모스크바 최고의 아랍통이 되다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는 1929년 키예프에서 태어나 그루지야의 트빌리시에서 어머니 손에 자랐다. 모스크바동양학대학에서 아랍어를 배운 그는 학자, 기자, 정보 협력자의 경계가 흐릿한 소련식 중동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으로 카이로에 주재하며 나세르 시대의 아랍 세계를 속속들이 익혔고, 아랍 지도자들과의 인맥은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귀국 후 그는 학계의 사다리를 올라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과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그의 연구소들은 순수 학문 기관이 아니라 당과 정부에 세계를 해석해 주는 두뇌집단이었고, 프리마코프는 그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해석자였다.
이념보다 세력균형을, 선언보다 채널을 믿는 그의 현실주의는 이 시절에 벼려졌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이 학자는 고르바초프의 눈에 들어 정치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비밀 중동 외교: 이스라엘, 이라크, 걸프 위기
프리마코프의 중동 전문성은 학계에 머물지 않았다. 1971년 8월, 정치국 결정으로 그는 소련과 단절되었던 이스라엘과의 비밀 접촉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IMEMO 부소장이었던 그는 '공공 인사' 신분으로 1977년까지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방문하거나 빈에서 이스라엘 지도부와 회동했다. 대화 상대는 골다 메이어, 모셰 다얀, 이츠하크 라빈, 메나헴 베긴 등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이 임무를 극비로 추진했으며, 크렘린의 승인 아래 안드로포프와 그로미코도 이를 지지했다. 프리마코프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소련과 서방의 안전보장을 제안했으나, 외부 보장의 실효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협상은 교착되었다.
1970년대 그는 이라크 내 쿠르드 반군 지도자 마수드 바르자니와 정기적으로 접촉한 유일한 소련 대표였으며,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쿠르드 간 평화협정 체결에 관여했다. 그가 제안한 쿠르드 자치권 부여, 자체 정부 구성, 부통령직 제공 등의 방안은 이행되지 못했고 1974년 무장투쟁이 재개되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프리마코프는 고르바초프의 특사로 바그다드에 파견되어 사담 후세인과 독대했다. 이 임무는 억류된 약 5천 명의 소련 전문가 석방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를 설득하는 이중 목적을 띠었다. 후세인은 1,500명의 귀국만을 허용했으나, 프리마코프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지도부는 처음으로 국제적 고립을 인식하고 부분 철수를 포함한 정치적 해결 가능성을 시사했다. 프리마코프는 이후 워싱턴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게 이 대화 내용을 전달했고, 부시는 침략에 대한 보상처럼 보이는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2003년 3월, 미국 주도 이라크 침공을 불과 며칠 앞두고 푸틴 대통령은 프리마코프에게 사담 후세인을 만나라는 개인적 임무를 맡겼다. 3월 17일 밤 크렘린으로 호출된 프리마코프는 다음 날 아침 바그다드로 떠나 후세인과의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푸틴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조국과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라크 국민을 불가피한 희생에서 구하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후세인은 묵묵히 들은 뒤 타리크 아지즈 부총리가 참석한 자리에서 메시지를 반복하도록 요청했고, 이후 프리마코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떠났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세 번의 바그다드 임무는 프리마코프가 냉전 말기부터 21세기 초까지 중동 긴장의 최전선에서 소련과 러시아의 비공식 외교 채널로 기능한 독특한 이력을 보여준다.
고르바초프의 특사, 바그다드의 밤
1989년 프리마코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새 의회의 연방회의 의장을 맡았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그는 고르바초프의 특사로 바그다드를 오가며 사담 후세인을 세 차례 만났다. 옛 동맹국을 전쟁에서 빼내려는 이 중재는 미국의 의심을 샀고 결국 실패했지만, 무너져 가는 초강대국이 마지막까지 독자 외교를 시도한 장면으로 남았다.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그는 안전보장회의 위원으로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공개 규탄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뒤 고르바초프는 그에게 KGB 해외정보 부문을 맡겼고, 소련이 소멸하자 이 조직은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이 되었다. 학자 출신의 첫 정보기관장은 5년간 조직을 격변에서 지켜 냈다.
당 서열에도 정보기관에도 옐친의 새 질서에도 두루 살아남은 이 이력은, 진영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한다는 그의 처세가 어느 진영에서나 쓸모 있었음을 보여 준다.
대서양 위의 회항, 다극 세계의 설계자
1996년 외무장관이 된 프리마코프는 러시아 외교의 문법을 바꿨다. 미국 일극 체제를 거부하고 러시아·중국·인도의 삼각 협력과 다극 질서를 주창한 이 노선은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게 된다. 1998년 8월 국가부도 직후 그는 여야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총리에 올랐고, 공산당 출신 마슬류코프를 부총리로 앉힌 내각은 예상을 깨고 경제를 안정시켰다.
1999년 3월 24일, 워싱턴으로 향하던 그의 전용기는 대서양 상공에서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개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기수를 돌려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프리마코프의 회항」은 탈냉전기 러시아가 서방에 던진 가장 극적인 항의 표시로 역사에 남았다.
지지율이 대통령을 넘보자 1999년 5월 옐친은 그를 해임했고, 그해 가을 크렘린은 총력 언론전으로 그의 대선 도전을 주저앉혔다. 승자는 그가 아니라 푸틴이었다. 그러나 2015년 그가 죽었을 때, 러시아 외교가 걷고 있던 길은 누가 보아도 프리마코프가 그린 지도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