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경력 연표

1910년 코펜하겐 — 세계 여성의 날을 발명하다

1910년 8월, 제2인터내셔널 국제여성대회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17개국에서 100여 명의 여성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53세의 클라라 체트킨은 하나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매년 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날을 개최할 것."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도 하에 있었다. 상류·중류층 여성들의 선거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노동계급 여성들의 경제적·사회적 해방은 의제 바깥에 있었다. 체트킨은 이 구도를 깨고자 했다.

그녀가 제안한 '여성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 노동자들의 정치적 동원을 위한 조직 도구였다. 참정권 요구를 계급투쟁의 일부로 재위치시키는 전략적 장치였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해방은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해방 없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체트킨 여성운동의 핵심이었다.

첫 국제 여성의 날은 이듬해인 1911년 3월 19일에 개최되었고,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1917년 2월 혁명은 여성 노동자들의 여성의 날 파업에서 시작되었다)을 거쳐 3월 8일로 고정되었다.

체트킨은 이 날이 단지 기념일이 아니라 전투의 날임을 잊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1915년 베를린 — 전쟁에 맞선 여성들

1914년 8월, 독일 사민당(SPD) 의회 교섭단체가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을 때, 체트킨에게는 국제 연대의 원칙이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당의 '성내평화'(Burgfrieden) 노선을 거부했다.

1915년 3월, 체트킨은 베를린에서 국제 여성 반전 회의를 조직했다. 전시 검열과 경찰 감시 아래, 영국·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 등 교전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여성 대표들이 모였다. "이 전쟁에서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각국에서 소수의 소수 — 대포와 장갑판을 만드는 자들뿐이다." 체트킨의 개회사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계급 연대를 호소했다.

회의 직후 그녀는 '보호구금'에 처해졌고, 이후에도 반전 활동으로 수차례 체포되었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 1917년 독립사민당(USPD) 창립에 참여했으며, 1918년 말 독일 공산당(KPD) 창립으로 이어졌다. 체트킨에게 반전 투쟁은 여성운동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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