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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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해 당 언론·노동조합·협동조합 조직에 힘썼다.
- 1929–1939공산주의 노동조합 총서기를 지냈다.
- 1945전후 결성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의장이 되었다.
- 1948공산당 정권 장악 뒤 정치서기국 위원과 체코슬로바키아 총리가 되었다.
- 1953–1957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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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 19482월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주도하고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 1948–1953부총리를 지냈다.
- 1951–1953종교사무 국가국 장관을 지냈다.
- 1953–1964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다.
- 1968프라하의 봄 개혁을 지지했으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했다.
1948년 2월 비공산당 경찰 간부 해임으로 정부 위기를 촉발시킨 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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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대의원
- 1929KSČ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41–1942런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위원 → 부의장
- 1945–1953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53–1955체코슬로바키아 노동사회복지장관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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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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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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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 1950「편향주의」 혐의 속에 사임을 강요당한 뒤 체포되었다.
- 1952슬란스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1963사후 복권되었다.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둡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둡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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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료
- 1937–1939스페인 내전 참전 (디미트로프 대대 지휘)
- 1947KSČ 중앙위 방위·보안부문 비서장
- 1948인민민병대 주참모장, 내무차관
- 1951–1955체포·고문, 1953년 25년형 선고, 1955년 무죄 석방
- 1968.04–08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68–1973강제 퇴임 후 KSČ 제명, StB 감시 속에 사망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한 유일한 프라하의 봄 지도자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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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KSČ 입당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군의관
- 1940–1945중국-버마 전선 군의관
- 1949–1952보건부 차관
- 1964–1968국민의회 의원 → KSČ 중앙위원
- 1968.04–08민족전선 의장 겸 KSČ 상임간부회 위원
- 1968.08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거부
- 1969–1977당 제명·의사면허 박탈, 이후 헌장 77 최초 서명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프라하의 봄 최고 개혁파가 된 사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둡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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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KSČ 입당, 붉은노조 청년서기
- 1944–1945지하 중앙위원,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 주도
- 1946–1948국민의회 의원, 인민민병대 부사령관으로 2월 쿠데타 지원
- 1951–1955슬란스키 사건 연루, 종신형 → 1955년 석방
- 1955–1963JZD 파블로비체 의장으로 복무
- 1963–1967복권, 중앙위원 → 임업·수자원부 장관
- 1968.04–1969.01국민의회 의장, 둡체크의 핵심 개혁 동맹
- 1968.08–1970모스크바 연행, 의정서 서명 → 후사크에 의해 축출·제명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둡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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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부의장
- 1946–1950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 — 민주당 해체 주도
- 1954–1960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 레오폴도프 교도소 수감
- 1968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 소련 침공 후 반개혁 노선으로 전환
- 1969–198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총서기 — 정상화 주도
- 1975–1989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89벨벳 혁명으로 사임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이르지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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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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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 1936–19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54–19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 1962–19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 1968.01–0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 1968–1988KSČ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대외정책·이념 총괄
- 1970「위기 발전의 교훈」 기초, 정상화의 교리적 헌장
- 1988.12정치국·서기직 해임, 1989년 당에서 제명
계획과 시장 사이의 '제3의 길'을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경제학자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둡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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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공산당 입당, 대독 저항운동 참가
- 1940–1945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61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68.04–12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겸 경제개혁 조정관
- 1970–1990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90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경제 고문
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둡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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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5–1956즐린(고트발도프) 지역당 서기
- 1960–1962KSČ 중앙위 계획부장
- 1962–1963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63–1968체코슬로바키아 교통장관
- 1968.08'초청 편지' 서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내정
- 1968–1971KSČ 중앙위 서기
- 1971–1989KSČ 정치국원, 연방의회 의장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만든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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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게슈타포 체포, 판크라츠·테레진 수감
- 1945–1953카렐대학교 철학부·자연과학부 수학, PhDr. 취득
- 1949–1954『트보르바』 부편집장, 『루데 프라보』 편집위원
- 1954–1966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6–1968과학기술혁명 학제간 연구팀장, 『갈림길에 선 문명』 출간
- 1967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9–198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 연구소장
- 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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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19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1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19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1970.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01–19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19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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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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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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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19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옛 룸메이트 고르바초프를 1967년 찾아가 개혁 구상을 설명했을 때, '그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했다'고 믈리나르시는 회고했다.
즈데네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둡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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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