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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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폴란드 통일노동당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Bolesław Bierut
폴란드 통일노동당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892–1956 ○ 심장마비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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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 1955동독 카를 마르크스 훈장 수훈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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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야쿠프 베르만

Jakub Berman
폴란드 노동자당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1–1984 ○ 자연사

폴란드 스탈린주의 권력의 이론가

베르만은 테레사 토란스카에게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에 복무하는 것은 단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내적 필요였다”고 말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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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폴란드 공산당 입당, 지식인 담당 활동
  • 1939–1941소련 점령지에서 폴란드어 공산주의 언론 편집
  • 1941–1944코민테른 국제레닌학교 강사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원, 국가보안·정무 감독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이념·문화·보안 담당
  • 1956정치국·중앙위원회에서 사임
  • 1957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서 제명
  • 1958–1969『책과 지식』 출판사 편집자

스타니스와프 길랴로비치 포프와프스키

Станислав Гилярович Попла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인 1902–1973 ○ 사망

포즈난 봉기를 진압한 폴란드계 소비에트 장군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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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징집, 병사로 복무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44–1945폴란드 제1군 사령관, 베를린 공방전
  • 194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 1949–1956폴란드 국방성 차관
  • 1956포즈난 6월 봉기 진압 지휘
  • 1956–1963소련 국방성 복귀, 육군대장으로 퇴역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5–1982 ○ 폐암

1956년 폴란드 10월로 복귀해 '폴란드식 사회주의 길'을 실험한 민족공산주의자

1956년 10월 폴리트뷰로에서 — 「총검으로 통치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통치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분할령 갈리시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부터 배관공으로 일했다. 1926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3년 지하 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로 밀려나 1951~1954년 옥살이를 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10월 20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소련군의 진격에는 저항하되 동맹은 유지한다는 입장을 관철해 소련이 물러섰다. 1967~68년 반유대 캠페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로 개혁 노선은 끝났고, 1970년 12월 가격 인상에 항의한 그단스크·그디니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군대의 발포를 명령했다. 사인은 폐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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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폴란드 공산당 입당
  • 1934–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43–1948폴란드 노동자당 서기장
  • 1948–1951'민족주의적 일탈'로 숙청·해임, 1951년 체포
  • 1954–1956석방·복권, 폴란드 10월로 복귀
  • 1956–197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 1970.12가격 인상 반대 파업 유혈 진압, 심장발작 뒤 12월 20일 해임

스테판 스타셰프스키

Stefan Staszewski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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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청년공산주의동맹(KZMP) 가입
  • 1926–1929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0–1932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활동
  • 1938–1945NKVD에 체포, 콜리마 강제수용소 8년형
  • 1945–1948카토비체주 선전비서, 『트리부나 로보트니차』 편집장
  • 1948–1954PZPR 중앙위원회 출판·언론부장
  • 1955–1957PZPR 바르샤바 위원회 제1서기
  • 1957–1958폴란드 통신사(PAP) 사장
  • 1968반유대 캠페인으로 PZPR에서 축출
폴란드 통일노동당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사망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 1956년 폴란드 해빙기의 과도기적 제1서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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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1939바르샤바 방어전 참전 후 소련으로 이동
  • 1943베를링군 제1사단 정치위원, 레니노 전투 참전
  • 1944–1946PPR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 1949–1950국방차관 겸 군 정치총국장
  • 1956.03–10PZPR 제1서기, 흐루쇼프 비밀연설 대량 유포 결정
  • 1964–1968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68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해 전직 사퇴

아담 라파츠키

Adam Rapacki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70 ○ 자연사

동서 긴장 속에서 협상 공간을 넓힌 외교가

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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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독립사회주의청년동맹 가입
  • 1939–1945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교육·정치 활동
  • 1947–1950폴란드 해운장관
  • 1950–1956고등교육·과학 및 고등교육 장관
  • 1956–1968폴란드 외무장관
  • 1964유럽안보회의 소집 제안
  • 19683월 사태 뒤 정치 활동에서 이탈
  • 1948–1968PZPR 정치국원(1954~56년 후보위원)
  • 1968.12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외무장관직에서 해임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Piotr Jaroszewicz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92 ✕ 피살 · 미해결

차관료적 성장 노선의 총리

1976년 가격 인상안은 노동자들의 봉기 뒤 하루 만에 철회되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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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초등학교 교사·학교장
  • 1943–1945소련 내 폴란드군 정치교육 장교
  • 1945–1952폴란드군 고급 지휘·정치교육 보직
  • 1952–1970폴란드 정부 부총리
  • 1954–1956광업부·석탄광업부 장관
  • 1956–1970상호경제원조회의 폴란드 대표·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70–1980폴란드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1–1992정계 은퇴, 1981년 계엄 뒤 internment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Józef Cyrankiewicz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인 1911–1989 ○ 자연사

저항의 생존자이자 체제의 수호자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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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폴란드 사회당과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
  • 1935–1939크라쿠프 지역 폴란드 사회당 노동자위원회 서기
  • 1942–1945아우슈비츠와 마우트하우젠 수감, 수용소 저항조직 활동
  • 1945–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
  • 1947–1952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54–1970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70–1972국가평의회 의장
  • 1973–1986전국 평화위원회 의장, 세계평화평의회 위원
폴란드 통일노동당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13–2001 ○ 진폐증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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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프랑스 공산당 입당, 랑스 탄광 지구에서 활동
  • 1934레포레스트 탄광 점거 파업 주도, 폴란드로 강제 추방
  • 1937–1946벨기에 이주, 벨기에 공산당 및 대독 레지스탕스 '백색여단' 활동
  • 1948–1954귀국, PZPR 카토비체 주당 서기, 이후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57–1970PZPR 카토비체 주당 제1서기 — '카토비체 공국'의 실리적 통치
  • 1970–1980PZPR 중앙위 제1서기 — '기에레크의 10년'
  • 1976–1980국가평의회 위원 겸임
  • 1981PZPR 제명, 계엄령 하 인터닝 (1981.12–1982.12)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계엄령과 원탁회의 사이의 폴란드 지도자

1989년 원탁회의는 억압적 통치의 책임과 평화적 체제 이행이 한 인물의 경력 안에서 충돌한 사례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지도자다.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해 연대노조를 탄압했으나, 1989년에는 야권과의 원탁회의 및 부분 자유선거를 받아들여 체제 전환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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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계엄령 선포
  • 1981–1989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 1989원탁회의·부분 자유선거 수용
  • 1989–1990전환기 폴란드 대통령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인 1924–1997 ○ 자연사

양보로 위기를 봉합한 당 관료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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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농민자조조합 중앙위원회 간부
  • 1953–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59–1970농업부 장관
  • 1970–1981폴란드 인민공화국 부총리
  • 1971–1975각료회의 계획위원회 위원장
  • 1971–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루블린 7월 파업 및 그단스크 8월 협상 정부 대표
  • 1980–1981그단스크 협정 정부 서명자

체스와프 얀 키슈차크

Czesław Jan Kiszczak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25–2015 ○ 자연사

계엄령 실행자에서 원탁회의 공동의장이 된 폴란드 내무장관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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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9군사정보부장 (총참모부 제2국)
  • 1979–1981내부군사부장 (WSW)
  • 1981–1990내무장관
  • 1981–1983구국군사평의회 위원
  • 1982–1990폴란드 통일노동당 정치국 위원
  • 1989원탁회의 정부 측 공동의장
  • 1989.08총리 지명 (내각 구성 실패)
  • 1989–1990부총리 겸 내무장관

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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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폴리티카』 편집장
  • 1972–1989세임 의원
  • 1981–1985야루젤스키 내각 부총리
  • 1988–1989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
  • 1989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 낙선
  • 1989–1990PZPR 마지막 제1서기, 당 해산 주재
  • 1990–2008『지시』 월간지 편집장, 회고록 집필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Stanisław Kania

타협을 모색하다 당권을 잃은 당 지도자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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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폴란드 노동자당 입당
  • 1948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창립대회 대표
  • 1968–197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 1971–198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5–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5폴란드 국가평의회 위원

야체크 얀 쿠론

Jacek Jan Kuroń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민 연대를 잇은 반체제 사회주의자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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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적색 스카우트 운동 공동조직자·월터 대원대 지휘관
  • 1965–1967「당에 보내는 공개서한」 공동 저자, 정치범
  • 1968–19713월 학생 시위 조직자, 정치범
  • 1976–1977노동자 방어위원회(KOR) 공동 창립자
  • 1980–1981독립자치노조 연대 전국위원회 자문역
  • 1981–1984계엄령 수감자, KOR 재판 피고인
  • 1989–1991노동·사회정책 장관
  • 1992–1993노동·사회정책 장관
  • 1989–2001폴란드 하원의원

당의 통제와 노동자 협상 사이에 선 개혁파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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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입당
  • 1964–1968엘블롱크 지구당 위원회 서기
  • 1968–1971트체프 지구당 위원회 서기
  • 1971–1975그단스크 주 당 위원회 서기
  • 1975–1982그단스크 주 당 위원회 제1서기
  • 1976–1985폴란드 인민공화국 의회 의원
  • 1982–1986헬싱키 주재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
  • 2001–2005라트비아 주재 폴란드 대사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

Zdzisław Kurowski

청년조직 출신의 당 관료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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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6폴란드 청년동맹 활동가
  • 1957–1972농촌청년동맹 중앙위원장
  • 1969–1985폴란드 인민공화국 하원 의원
  • 1972–1975비아위스토크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5–1980PZPR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원
  • 1977–1980PZPR 중앙위원회 경공업·상업·소비부장
  • 1980PZPR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82–1989대외경제 관료, RWPG 및 무역부

레셰크 발체로비치

Leszek Balcerowicz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이자 체제전환의 상징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를 추구함으로써 기회의 창에 대비해야 한다.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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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SGH 바르샤바 경제대학 졸업
  • 1978–1980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연구원, 비공식 개혁팀 주도
  • 1980년대연대노조 경제 고문
  • 1989–1991부총리 겸 재무장관, 발체로비치 계획 실행
  • 1995–2000자유연합당 당수
  • 1997–2000부총리 겸 재무장관(2차)
  • 2001–2007폴란드 국립은행 총재
  • 2007–현재시민개발포럼(FOR) 창립·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