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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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1901–1903사회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혁명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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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1901–1902분산된 사회혁명주의 그룹들을 단일 사회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1917년 7월 4일,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겨냥한 반역 혐의 자료의 언론 공개를 승인했다.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건을 변호한 법률가로, 혁명기에는 법무 행정과 임시정부의 질서를 맡았다. 그는 1917년 7월 볼셰비키와 독일의 연계를 주장하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해 정치적 탄압의 분위기를 키웠고,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은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았다. 공개가 정부와 조율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사임한 뒤 내전과 망명을 거쳐 프랑스에서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 참여했다.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는 사회혁명당 계열의 농업경제학자이자 농민 협동조합 운동의 조직가였다. 그는 토지개혁을 지지했지만 농민의 지주지 무단 점거에는 반대하며 법적 개혁과 농촌 자치를 결합하려 했다. 1917년 10월 농업장관으로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시간을 맞았고,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뒤에도 제헌의회와 협동조합의 길을 지지했다. 훗날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옹호한 그는 1938년 처형되었다가 1988년 복권되었다.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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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나로드니키 서클에서 활동, 1894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0농업사회주의동맹 공동 창립, 농민 대상 불법 출판물 배포
1902사회혁명당(PSR) 공동 창립, 중앙위원, 기관지 《혁명 러시아》 편집자
1905–1907제1차 당 대회 주도, 제2두마 사회혁명당 원내대표, 혁명 진압 후 재망명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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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유배지 루스코예 우스티예에 도착한 젠지노프는 일기에 썼다: '이곳은 물론 러시아지만, 17세기, 어쩌면 16세기의 러시아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이자, 세 차례의 시베리아 유배를 북극 시베리아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로 바꿔낸 언론인이었다. 1918년 사마라 제헌의회 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하다가 옴스크 쿠데타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하는 망명 언론인으로 살았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타간카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마지막 말: "어머니께 내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사회혁명당(PSR)에서 분리된 급진좌파 '최대주의자'(SSRM)의 창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당시 카잔 철도의 전투부대를 지휘했으며, 1906년 3월 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에서 87만 5천 루블을 탈취한 유명한 '엑스'를 주도했다. 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학생으로 1904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월 선언 사면으로 풀려나 즉시 무장투쟁에 복귀했으며, PSR의 단계적 혁명론을 거부하고 전면적 사회화와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 최대주의자들의 실천적 핵심이었다. 1906년 8월 체포 시 무장 저항하다 중상을 입고 며칠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24세의 나이로 타간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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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4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사회혁명당(PSR) 입당
1904모스크바 선전활동으로 체포, 7년형 선고
1905.1010월 선언 사면으로 석방
1905.12모스크바 무장봉기 — 카잔 철도 전투부대 지휘, 치스티예 프루디·프레스냐 전투 참가
1906.03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 탈취 작전 지휘 (87만 5천 루블)
1906사회혁명당-최대주의자 동맹(SSRM) 공동 창립
1906.08–09아크바리움 정원 인근에서 체포 시 무장저항·중상, 군법회의 사형선고, 타간카 감옥 교수형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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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시베리아 치머발트파와 함께 반전 국제주의 활동을 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차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형 미하일 고츠를 따라 사회혁명당에 들어갔고, 1906년 당의 전투조직에 가담했다.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15년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2년 SR 재판에서 주피고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24년 감형되고 1925년 울리야놉스크로 유배되었다. 1937년 다시 체포되어 1939년 25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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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SR 전투조직 가입, 테러 계획 참여
1907체포, 8년 카토르가(중노동형) 선고
1915–1917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 유형지 정착, '시베리아 치머발트파' 활동
1917.03–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 지도자, 집행위원
1917.06–10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
1917.10–1918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 융커 봉기 지휘
1918–1920내전기 SR 무장분대 조직, 볼셰비키·백군 양면 전선
1922SR 재판 주피고인, 사형 선고 후 감형
1925–1937심비르스크(울리야놉스크) 유형, 경제계획 업무
1937–1940대숙청 중 체포, 1939년 6월 20일 25년형 선고, 1940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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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 때문에 이 결행을 맡았다... 루제놉스키 이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으며 사는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 1906년 재판에서의 진술
러시아 혁명운동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 탐보프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02년 체육관을 중퇴했다. 1906년 농민 탄압을 주도한 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를 암살해 전국적 민중 영웅이 되었고,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네르친스크 카토르가로 보내졌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되어 좌파 사회혁명당의 지도자로 부상,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을 맡았고 볼셰비키의 지지로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되었다. 1918년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에 가담한 뒤 수십 년간 투옥과 유배를 겪었다. 1937년 우파에서 다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9월 11일 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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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사회혁명당원, 전투분대 가입
1906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 암살;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네르친스크 카토르가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918.01볼셰비키 분파가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 (153표, 체르노프 244표)
1918.07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가담, 체포; 1년형 선고 후 사면
1919–1930반복적 체포, 유배, 정신병원 감금; 1923년 해외 탈출 시도 실패
1937우파에서 체포, '사회혁명당 중앙' 조직 혐의로 25년형
1941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 사료는 9월 11일 이곳에서 157명의 정치범이 처형되었다고 기록한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사령부와 떠돌던 소문의 영향으로 자신을 겨냥한 예상 밖의 행동을 두려워했다」, 훗날 필로넨코가 조사위원회에 남긴 증언이다.
막심 필로넨코는 변호사 출신의 사회혁명당 정치인으로, 1917년 최고사령부 정부 위원으로서 코르닐로프·사빈코프와 함께 사형제 부활과 군율 강화를 밀어붙인 인물이다. 코르닐로프 봉기 국면에서는 케렌스키 편에 섰고, 10월 이후 반볼셰비키 지하활동에 참여했다가 망명해 변호사와 법학 교수로 활동했다.
1918년 아이히호른 암살을 조직하고 소련 감옥과 유형으로 반평생을 보낸 좌파 사회혁명당원
1918년 키예프에서 보리스 돈스코이와 함께 독일 점령군 사령관 아이히호른 암살을 준비했고,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데카브리스트 표트르 카홉스키의 종손녀로, 1905년 이후 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에 들어가 1908년 징역형을 받고 네르친스크에서 스피리도노바와 함께 복역했다. 10월 혁명 뒤 좌파 사회혁명당에 합류했다. 1918년 당이 브레스트 강화에 맞선 테러를 재개하자 보리스 돈스코이와 키예프에서 아이히호른 암살을 준비했고,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암살은 실패했다. 독일 군법회의의 사형 선고 뒤 1919년 1월 풀려났다. 1921년부터 소련의 유형과 1937년 재판, 크라스노야르스크 수용소를 거쳐 1954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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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4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 1907년 체포, 네르친스크 징역
1917–1918좌파 사회혁명당, 제2차 소비에트 대회 간부회 위원
1918–1919좌파 사회혁명당 전투조직, 아이히호른 암살 조직, 독일 감옥에서 사형 선고 뒤 석방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권력은 차르의 사형집행인들 손에서 빼앗아, 공산당 사형집행인들 패거리에게 넘기라고 빼앗은 게 아니다」 — 봉기 중 배포한 전단에서
차르 치하에서 20년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복역한 사회혁명당 전투원.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키르사노프 현 민병대장을 지냈으나, 볼셰비키의 식량강제징발과 지방 통치에 반발하여 1918년 지하로 잠적했다. 1920년 8월 탐보프 농민봉기를 장악해 약 20개 연대 규모의 유격군을 조직하고 '노동농민동맹'을 바탕으로 한 대안정부를 수립했으며, 봉기는 그의 이름을 따 '안토놉시나'로 불렸다. 1922년 6월 GPU 부대에 포위되어 동생 드미트리와 함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사회혁명당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혁명당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